AC.144, 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AC.144.심화
4. ‘자녀의 이름에 포함시키는 것들’
그들이 아들과 딸들에게 이름을 지을 때, 의미되는 것들에 따라 이름을 붙였기 때문인데, 모든 이름에는 그 자녀의 기원(origin)과 본성(nature)을 알 수 있게 하는 어떤 고유한 것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야곱의 열두 아들을 다루게 될 때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들 속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들의 근원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기’(calling by name)라는 말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윗글에서 한 가지... 아직 신생아에 불과한 이 아이가 나중에 어떤 quality의 인간이 될 줄 알고 저런 모든 걸 다 담은 이름을 지을 수 있나요?
바로 그 지점 때문에 현대인은 AC.144를 읽을 때 가장 낯설어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거의 ‘부모 취향’이나 ‘발음’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갓난아이 이름에 그 사람의 origin과 nature, 심지어 이후 상태까지 담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작명 기술이 아니라, 고대 특히 태고, 고대교회의 ‘상응적 사고방식’입니다.
핵심은, 고대인들이 미래를 점쟁이처럼 다 예측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과 사건을 ‘섭리와 상태의 흐름 속에서’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은 단순 역사 기록용 이름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영적 상태를 표상하도록 섭리 가운데 주어진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의 이름들을 거의 언제나 상징적, 표상적 이름으로 읽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아담’은 단순 개인 이름이라기보다 인간(humanity)의 상태를, ‘가인’은 신앙의 분리된 상태를, ‘노아’는 새로운 교회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도 단순 가족 족보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 안의 다양한 영적 상태들을 순서대로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단순 호적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가 섭리 안에서 어떤 상태를 표상하는가’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AC.144의 문맥에서 ‘이름 속에 origin과 nature가 들어 있다’는 것은, 부모가 인간적으로 아이의 미래를 완벽히 예언했다는 뜻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는 이름 자체가 그 존재의 영적 의미와 역할을 표상하도록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 역사 속에서도 고대인들은 이름을 매우 의미 중심으로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어떤 체험을 했는지, 어떤 소망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단순 기호가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해석과 기대를 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성경 안에서는 이것이 단순 문화 차원을 넘어, 섭리적 상응 구조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nature는 완전히 무(無)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사랑의 방향성과 성향 속에 태어나고, 섭리는 그것까지도 포함해 역사합니다. 그래서 이름은 단순히 ‘나중 결과를 예언한다’기보다, ‘그 존재 안에 있는 방향성과 역할’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사람에게 붙이는 임의적 표지’로 보지만, 고대교회적 사고에서는 이름이 ‘그 존재의 영적 상태와 역할을 드러내는 표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AC.144는 ‘고대인들이 초능력으로 미래를 다 알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름 자체를 존재의 본질과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상응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성경 안에서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이름들이 그런 의미를 담도록 기록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AC.144, 창2:19-20,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의 의미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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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4, 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AC.144.심화 3. ‘이름’(name),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e) 고대인들이 ‘이름’(name)으로는 어떤 것의 본질(essence)을 이해하였고, ‘보고 이름으로 부르기’(seeing and calling by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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