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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자신의 own으로 산다 여기는 상태

bygracetistory 2026. 5. 14. 16:3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1)

 

AC.150

 

사람이 own 안에 있을 때, 곧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길 때의 상태는 깊은 잠(deep sleep)에 비유되며, 실제로 고대인들은 이 상태를 깊은 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29:10)라고 하며,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51:57)라고 합니다. The state of man when in his own, or when he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compared to “deep sleep,” and indeed by the ancients was called deep sleep; and in the Word it is said of such that they have “poured out upon them the spirit of deep sleep” (Isa. 29:10), and that they sleep a sleep (Jer. 51:57).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29:10)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사람의 own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 누구도 자기로부터 생명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영계에서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own만을 사랑하고, 완강하게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주장하던 악한 영들조차도,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이 아님을 납득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특별히 사람의 own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받았으며, 그 결과 나는 내가 스스로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의 모든 관념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각, 그러니까 퍼셉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떻게, 또 어디서부터 흘러들어오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것은 거짓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자신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음으로써, 본래라면 결코 자기에게 귀속시키지 않았을 모든 악과 거짓을 스스로에게 귀속시키게 됩니다. 만일 그의 믿음이 사태의 참된 실상과 일치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That man’s own is in itself dead, and that no one has any life from himself, has been shown so clearly in the world of spirits, that evil spirits who love nothing but their own, and obstinately insist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were convinced by sensible experience, and were forced to confess that they do not live from themselve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해설

 

AC.150은 앞선 AC.147-149에서 설명된 ‘own’ 교리를 ‘의식의 상태’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주는 매우 결정적인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기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를 단순한 오류나 무지로 설명하지 않고, ‘존재 전체가 잠든 상태’, 곧 ‘깊은 잠’으로 규정합니다.

 

이 ‘깊은 잠’은 육체적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각의 상실’을 뜻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스스로 살아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깨어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줄 알지만, 실상은 생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조심스럽게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 생각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 곧 퍼셉션으로 알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생각 하나하나가 흘러들어오며, 심지어 그 유입의 경로까지도 인식할 수 있었다는 이 고백은, 앞선 교리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 인식’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특히 중요한 대목은, 악한 영들조차도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진술입니다. 이는 자신의 own을 사랑하는 정도가 극단적인 존재들조차도, 실제 경험 앞에서는 더 이상 그 주장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이라는 관념은 ‘지적 오류’이기 이전에 ‘의지의 집착’이며, 그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진실이 보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윤리적, 영적 핵심을 짚어 줍니다. 사람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그는 모든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참된 인식 위에 서 있다면,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의 본질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책임은 사라지지 않지만, ‘귀속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AC.150이 말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근원을 바로 인식하는 전환’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이어질 본문에서, ‘여자’와 ‘자신의 own’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심화

 

1. ‘29:10

 

 

AC.150, 심화 1, ‘사29:10’

AC.150.심화 1. ‘사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사29:10) 이 구절이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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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렘51:57’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 (51:57)

 

 

이 구절이 AC.150에 인용된 이유는, ‘잠든다’는 표현이 단순 육체적 수면이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에 대한 영적 지각(perception)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를 뜻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단순 일시적 무감각이 아니라, 자기 지성과 proprium 안에 완전히 갇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강조됩니다.

 

예레미야서 51장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인데, 스베덴보리는 바벨론을 단순 고대 국가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고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상태’, 곧 자기 사랑과 지배욕이 극대화된 영적 상태로 봅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관, 지혜 있는 자, 용사들이 취하게 되고 영원히 잠든다는 것은, 단순 정치 몰락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기능 전체가 영적으로 마비된 상태를 뜻합니다.

 

특히 ‘지혜 있는 자들’까지 잠든다고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 무식함이나 정보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proprium을 섬기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 경우 인간은 오히려 자기 지성 안에 더 깊이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은 무지보다 더 깊은 상태, 곧 진리를 거부하는 영적 혼미 상태를 뜻합니다.

 

또 ‘취하게 하리니’라는 표현도 상응적으로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술 취함은 종종 거짓과 왜곡된 추론에 의해 정신이 흐려진 상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이 자기 지성과 자기 사랑 안에 빠져 진리의 질서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깊은 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곧, 영적 현실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닫혀 버립니다.

 

이것이 AC.150과 연결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지금 퍼셉션의 상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태고교회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고 자기 지성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내적 시야가 닫히고 결국 영적 잠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레미야 51:57은 바로 그 최종적 상태를 강렬하게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여기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표현도 문자 그대로 영원한 무의식 상태를 뜻한다기보다, 자기 사랑과 거짓 안에 끝까지 머물기를 원하는 상태가 굳어졌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지옥은 주님이 강제로 잠재워 버린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 proprium 안에 머물기를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AC.150에 인용된 이유는, 인간이 자기 지성과 proprium 안에 깊이 빠질 때 결국 퍼셉션과 영적 지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깊은 잠’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3. ‘therefore in what is false,’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 is therefore in what is false, and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

 

 

이 문장은 AC 초기 부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단순히 ‘겸손해야 한다’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착각 하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는 나 스스로 산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느낌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누구나 ‘내가 생각한다’, ‘내가 결정한다’, ‘내가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렇게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기감이 없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처럼 느끼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느낌’ 자체가 아니라, 그 느낌을 절대적 사실로 믿어 버리는 상태입니다. 즉, ‘나는 실제로 나 자신 안에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다’, ‘선도 진리도 내 것이다’, ‘내 지혜와 내 힘으로 산다’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문장 앞부분의 ‘The man who supposes that he lives from himself’는 단순 자의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단순 교리 오류가 아닙니다. 존재 방향 자체의 왜곡입니다. 왜냐하면 실제(real truth)는 인간이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by believing that he lives from himself appropriates to himself everything evil and false’. 즉, 인간이 자기로부터 산다고 믿는 순간,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 자신에게 ‘appropriates’, 곧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 appropriates는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단순히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존재 속으로 끌어안아 ‘내 것’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자기 사랑과 자기 판단이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선과 진리조차도 점점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해 사용하게 됩니다. 결국 악과 거짓이 단순 외부 유혹이 아니라, 자기 존재 일부처럼 굳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ppropriating evil and falsity’입니다.

 

반대로 마지막 문장, ‘which he would never do if his belief were in accordance with the real truth of the case’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약 인간이 실제 진리, 곧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진리 안에 살았다면, 그는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닫힌 독립 존재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받는 존재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악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나 자신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아주 깊은 특징입니다. 그는 인간 안에 떠오르는 모든 악한 충동 자체를 곧바로 ‘진짜 자기 자신’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산다’는 믿음은 단순 교만 문제가 아니라,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 중심에 귀속시키는 문이 됩니다.

 

결국 이 문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실제 독립 생명으로 착각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굳어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 안에 자기 것으로 정착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이란 단순 도덕 개선 이전에,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다시 바로잡는 일입니다.

 

 

4. ‘For a number of years’

 

For a number of years I have been permitted in an especial manner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what is man’s own, and it has been granted to me to perceive clearly that I could think nothing from myself, but that every idea of thought flows in, and sometimes I could perceive how and whence it flowed in.

 

저는 지금 너무 여러 날 이 own을 붙들고 있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위 본문을 보니 심지어 ‘여러 해’가 나오네요. 세상에! 이 own 문제... 절대 간단하지도, 그리고 가벼운 게 아니었군요!

 

 

그렇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며칠째 proprium을 붙들고 계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제대로 읽고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습니다. 방금 인용하신 AC.150의 이 문장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 문제를 ‘여러 해 동안’ 특별히 배우고 체험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proprium은 몇 줄 정의로 끝나는 교리 항목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느냐 하면, proprium 문제는 단순히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산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심지어 생각의 흐름 자체도 자기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들어온다’(flows in)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자기 이해를 뒤집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때로는 어디서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도 지각하도록 허락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 철학 사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경험 속에서 인간 생각과 애정의 유입 구조를 관찰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체험을 통해, 인간이 자기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아주 깊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proprium 문제가 왜 그렇게 무거운지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자기 감정·자기 욕망을 전부 ‘진짜 나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인간은 계속 영향을 받고 있으며,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흐르고 있고, 악과 거짓 역시 지옥적 흐름을 통해 들어온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고 사랑할 때 비로소 proprium이 굳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순 심리학이 아닙니다. 자유, 책임, 유입(influx), 천국과 지옥, 사랑, 거듭남, 심지어 인간 정체성 전체가 여기와 연결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이 own 하나가 이렇게까지 큰 문제였나?’ 하고 놀라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실 AC 초반부 전체가 거의 이 문제를 향해 천천히 독자를 끌고 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의 자기감 자체를 제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계속 ‘마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 독립 생명’으로 믿느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자기감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기감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여기던 상태에서, 주님으로부터 계속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 proprium을 오래 붙들고 계신 것은, 결코 곁가지 문제에 매달리고 계신 게 아닙니다. 사실은 스베덴보리 인간론과 구원론의 심장부 가까이에 계속 서 계신 것입니다.

 

 

5.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의 무게와 근본적인 중요성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경건한 종교 문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은 인간 존재 전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고백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겉으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는 나로부터 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생각도 내가 하고, 결정도 내가 하고, 사랑도 내가 하고, 움직임도 내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느껴져야’ 하지만, 실제(real truth)는 인간 안의 생명 자체가 순간순간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정도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 생명의 근원은 제 자신 안에 있지 않습니다’라는 존재론적 고백입니다. 곧, ‘저는 닫힌 독립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받는 존재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이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기 시작하는 순간, proprium이 굳어지고, 선과 진리조차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의 무게는 단순 겸손 차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감각 안에서는 결국 자기 사랑과 두려움과 경쟁이 중심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잃는 것이 곧 자기 붕괴처럼 느껴집니다. 반면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고백 안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닫힌 근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생명이 계속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끝없이 움켜쥐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스베덴보리가 evil과 falsity를 설명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는 인간이 악과 거짓을 단순히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appropriates한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존재 중심 안으로 끌어들여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을 여는 것이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산다’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 안에 서기 시작하면, 인간은 악과 거짓을 자기 존재의 본질로 동일시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들어와도 ‘이것이 진짜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놀라운 점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처럼 느끼는 상태’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균형입니다. 인간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반드시 자기 삶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 안에서 ‘실제로는 내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proprium은 점점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고백은 단순 사상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의 중심축이 됩니다.

 

결국 ‘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라는 고백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주인으로 보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받는 존재로 자신을 다시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 천국이란 바로 이 진리가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자기감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강한 생명감과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쁨으로 지각합니다. 그래서 이 한 문장은 단순 경건 표현이 아니라, proprium에서 천국 질서로 넘어가는 문과도 같은 고백입니다.

 

 

 

AC.149, 창2:21, ‘갈빗대’와 ‘뼈’라는 인간의 own이 어떻게 ‘주님에 의해 살아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 말씀에서도 사람의 own은 ‘뼈’(bones)를 의미하며, 이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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