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2, 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AC.152.심화
1. ‘여자, 곧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 곧 같은 말로 하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위 본문은 그러니까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러면 좀 이상한 게, 이 ‘여자’라는 own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own 아닌가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vivified된 own이 속인다? 너무 이상한데요?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이 이상함이 바로 AC.152 부근의 가장 어려운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분명, 주님께서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그것을 vivify, 곧 살아 있게 하셨다고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고 하니, 마치 주님께서 살려 주신 proprium 자체가 곧 속임의 원인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으로부터 vivified된 proprium’ 자체와,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중심으로 붙잡아 버린 상태를 구분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 열려 있는 proprium과 자기 자신에게 닫혀 버린 proprium은 같은 단어를 쓰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 ‘여자’로 상징된 proprium은 아직 질서 안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as if his own’, 곧 ‘마치 자기 것 같은’ 자기감이었습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이 없으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느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심지어 생명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기감을 ‘받는 그릇’으로 머무르지 않고, ‘독립 생명의 근원’으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proprium은 방향이 바뀝니다. 원래는 주님의 생명을 받아 흐르게 하던 구조였는데, 점점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려는 구조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그 굳어진 방향이 바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입니다.
그래서 AC.152의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언제나 그의 own’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감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존재임을 잊고, 자기 자신을 생명의 중심으로 삼기 시작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처음의 proprium은 ‘창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그 안을 통과하여 인간이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해 주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느 순간 그 창문을 거울처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즉, 더 이상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같은 proprium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후 계속 ‘천사에게도 proprium은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열린 proprium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천사들도 자기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지 않습니다. 반면 지옥적 proprium은 같은 자기감을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라는 own이 속였다’는 표현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기감 자체가 본래 악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기감이 점점 자기중심으로 굳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실제로 인간이 그것을 자기 독립 생명처럼 붙잡기 시작했을 때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proprium 문제를 그렇게 무겁게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위해 자기감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자기감 때문에 가장 깊이 미혹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AC.152, 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AC.152.심화 2. ‘왜 굳이 여자를 만들어 속게 하셨을까?’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vivified된 own조차 결국 속임의 통로가 되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좀 허무하게 끝날 것이었으면 그냥 오리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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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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