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4, 심화 1, ‘막10:14-16’
AC.164.심화
1. ‘막10:14-16’
14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10:14-16)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Mark 10:14–16) (AC.164)
이 구절이 AC.164에 인용된 이유는, ‘어린아이’가 단순 연령이 어린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 상태, 곧 innocence(순진무구)와 주님께 의존하는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막10:14-16에서 주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예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국 전체의 가장 깊은 원리와 연결합니다.
AC.164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proprium 안으로 내려오고, flesh 상태 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주님과 결합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린아이 상태’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 미성숙함이나 지식 부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독립 근원으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innocence는 ‘자신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와 깊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자기 힘과 자기 지혜를 절대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천국은 자기 자신 중심 존재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은, 단순 겸손하라는 윤리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proprium 중심 상태를 내려놓고, 다시 주님의 influx를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독립성의 극대화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 의존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안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또 이 구절은 AC.160-162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인간은 flesh 상태 안으로 내려오며, 자기 자신처럼 느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 안에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이처럼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가장 높은 천사들이 오히려 가장 어린아이처럼 보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가장 많이 알지만, 동시에 가장 깊이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시는 장면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안수’는 단순 의식 행위가 아니라 influx와 전달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우는 곳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상태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receptivity, 곧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깊은 역설도 있습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자기 지혜와 자기 판단을 강하게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다시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유치함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지혜 끝에서 다시 ‘나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innocence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높은 wisdom은 가장 깊은 innocence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164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이유는, 천국의 본질이 자기 독립성과 자기 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innocence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2-3에서 proprium 문제를 지나온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영적 상태이기도 합니다.
AC.164, 심화 2, ‘체어리티와 순진함이 own 안에 주입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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