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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0, 창2 뒤, ‘심장 관련, 천적 천사들과 결합된 느낌’

bygracetistory 2026. 5. 21. 21:44

사람의 사후,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기 The Resuscitation Of Man From Death, And His Entrance Into Eternal Life

 

AC.170

 

천적 천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심장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저는 심장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제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오직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뿐이었고, 이러한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Celestial angels were present who occupied the region of the heart, so that as to the heart I seemed united with them, and so that at length scarcely anything was left to me except thought, and the consequent perception, and this for some hours.

 

 

해설

 

이 단락은 사후 상태로의 이행 과정에서 ‘누가’, ‘어디에’, ‘어떻게’ 함께하는지가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는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막연히 ‘천사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분명히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을 차지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연한 표현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신학 전체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질서에 근거한 진술입니다. 심장은 사랑과 의지, 곧 생명의 중심과 상응하며, 천적 천사들은 사랑의 차원에 속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장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표현은, 그가 천적 천사들과 동일한 생명의 흐름 안에 놓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격이 소멸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더 이상 육체의 기관에 있지 않고, 사랑과 의지의 차원에서 천적 질서와 직접 연결되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이 상태가 ‘의식 상실’이나 ‘무아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육체적 기능과 감각이 물러날수록, 사고와 지각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지각하며’, 그 모든 과정을 기억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는 사후 생명이 흐릿하거나 무의식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정제된 의식의 상태임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또한 이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언급은, 죽음의 순간이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갑자기 무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외적 기능이 물러가고, 내적 기능이 전면에 드러나는 상태로 이행합니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천적 천사들의 보호와 동행이 있으며, 이는 주님께서 인간을 죽음의 문턱에서 홀로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란 단절이나 붕괴가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옮겨지는 사건임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육체의 심장은 점차 역할을 잃지만, 사랑과 의지의 심장은 천적 질서 안에서 더욱 분명해지고, 그 안에서 인간은 여전히 ‘나’로서 생각하고 지각하며 존재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증언하는 소생의 첫 장면입니다.

 

 

심화

 

1. ‘심장의 영역’(the region of the heart)

 

천적 천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심장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저는 심장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Celestial angels were present who occupied the region of the heart, so that as to the heart I seemed united with them, (AC.170)

 

여기 ‘심장의 영역’(the region of the heart)이 뭔가요? ‘심장이 있는 자리’라는 말인가요? ‘그로 인해 저는 심장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건 무슨 말인가요?

 

 

여기 ‘심장의 영역’(the region of the heart)은 단순히 ‘가슴 부위’라는 해부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famous한 ‘큰 사람’(Maximus Homo), 곧 ‘천국 전체가 하나의 인간 형상’이라는 사상과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그는 천국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인간으로 보았고, 각 천사 공동체는 그 인간의 특정 기관과 기능에 corresponding한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심장’은 특별히 사랑(love), 의지(will), 선(good), 그리고 천적(celestial) 생명과 연결됩니다. 반면 ‘폐’는 understanding, truth, faith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천적 천사들은 자주 ‘심장 영역’을 차지한다고 설명되고, 영적 천사들은 ‘폐 영역’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AC.170의 ‘천적 천사들이 심장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 천사 공동체가 천국 안에서 심장 기능에 corresponding하는 공동체였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은 특별히 주님 사랑과 천적 선의 흐름을 담당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로 인해 저는 심장과 관련해서는 그들과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라는 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천사들과의 결합이 단순 대화 수준이 아니라, 실제 생명 흐름과 affection 차원의 결합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심장’과 관련하여 결합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내 심장이 그들과 연결된 것 같았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입니다. 물론 물리 심장 연결이 아니라, 심장이 상징하는 사랑과 생명의 리듬 차원에서의 결합입니다. 마치 심장이 몸 전체에 박동을 보내듯이, 천적 천사들의 love influx가 스베덴보리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심장은 단순 혈액 펌프가 아닙니다. 인간 전체 생명의 중심 운동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심장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것은, 주님 사랑과 천적 affection의 흐름 안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그는 실제로 인간 몸의 기능과 천국 공동체 기능이 서로 corresponding한다고 보았다는 점입니다. 즉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듯, 천적 천사 공동체는 천국 전체 안에 사랑의 생명을 순환시키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폐가 호흡을 통해 몸에 리듬과 교환을 주듯, 영적 천사 공동체는 진리와 understanding의 흐름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AC.170의 이 장면은 단순 신비 체험 묘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천국을 ‘살아 있는 인간 구조’로 경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는 천사들을 단순 공중의 영적 존재들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heavenly organism 안에서 서로 기능적으로 연결된 존재들로 본 것입니다.

 

결국 ‘심장의 영역’은 천국 안에서 love와 celestial good에 corresponding하는 공동체 영역을 뜻하고, ‘심장과 관련해서 하나로 결합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들의 천적 사랑 influx 안으로 들어가 마치 같은 생명 박동을 공유하는 것 같은 결합감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2. ‘갑작스런 죽음에서도?’

 

그 결과 마침내 제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오직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뿐이었고, 이러한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and so that at length scarcely anything was left to me except thought, and the consequent perception, and this for some hours. (AC.170)

 

이런 상태는 고요하고 평안한 임종 때만 가능한 건가요? 청천벽력같은 교통사고나 전쟁이나 테러 같은 상황 가운데 맞이하는 갑작스런 죽음에서도 동일한가요?

 

 

스베덴보리 설명으로는, 네, 기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AC.170 이하에서 그가 설명하는 것은 ‘육체 죽음의 외적 상황’보다, 육체와 영 사이의 연결이 끊어질 때, 영 안에서 일어나는 더 깊은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요한 임종이든, 갑작스러운 사고든, 전쟁이든, 테러든, 본질적인 영적 과정 자체는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외적 사건으로만 봅니다. 평화로운 병상 죽음, 교통사고 즉사, 폭발, 익사 같은 차이에 크게 주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생명은 육체가 아니라 영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육체 차원의 충격이 곧 영 자체의 파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람이 죽는 순간 주님과 천사들이 매우 가까이 함께하며, 특히 심장과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는 과정 속에서도 영이 혼란 속에 방치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갑작스러운 죽음의 경우에도, 인간은 대개 곧바로 자신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점차 다른 상태 안으로 옮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AC.170의 ‘마침내 거의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만 남았다’는 상태는, 외적 감각과 육체 연결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보다 내적인 의식 상태가 남게 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육체 죽음 방식보다, 영이 점차 자연적 감각에서 분리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나 폭력적 죽음에서는 외적 의식 차원에 순간적 충격과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설명에서는 그것이 영의 본질 상태를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일수록 주님의 보호와 천사들의 돌봄이 더욱 가까이 작용한다고 말하는 흐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죽음 상태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아래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직후에도 한동안은 자신이 여전히 이전처럼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죽음이 존재 소멸이 아니라 상태 전이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전쟁이나 재난 속 sudden death도, 영적으로는 ‘갑자기 무(無)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영계 질서 안으로 인도되는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또 목사님께서 주목하신 AC.170의 상태는 굉장히 ‘조용한’ 표현처럼 들리지만, 이것 역시 꼭 외적 환경의 고요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 감각층이 뒤로 물러나면서, 더 내적인 의식만 남게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바깥에서는 매우 격렬한 상황 속 죽음이라도, 영 자체는 전혀 다른 층위에서 이 과정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는 순간이 너무 끔찍하면 영혼도 망가지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흐름에서는, 주님은 인간을 단순 외적 사고 현장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육체가 어떤 방식으로 끝나든, 영은 여전히 주님의 질서와 보호 아래 다음 상태로 인도됩니다.

 

 

3. 왜 ‘몇 시간’이나?

 

그 결과 마침내 제게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오직 생각과 그에 따른 지각뿐이었고, 이러한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and so that at length scarcely anything was left to me except thought, and the consequent perception, and this for some hours. (AC.170)

 

왜 ‘몇 시간’이나 지속되는 걸까요?

 

 

AC.170의 ‘몇 시간’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흥미롭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죽음을 단순 ‘순간적 소멸’이 아니라, 실제로는 단계적 전이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를 벗는 순간 곧바로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확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감각과 연결이 점차 풀리면서 영적 의식 쪽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실제로 어떤 ‘transition period’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몇 시간’이 꼭 지상 시간 개념 그대로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상태(state)가 시간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몇 시간’이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연적 의식에서 영적 의식으로 옮겨가는 일정한 상태 지속을 인간 언어로 표현한 것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는 실제로 그것이 전혀 찰나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시간이 필요한가? 스베덴보리 흐름에서는, 인간은 평생 육체 감각과 자연적 사고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그것이 완전히 제거되면, 인간 존재 전체에 너무 큰 충격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을 점진적으로 자연적 층위에서 영적 층위로 옮기십니다. 마치 아주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강한 빛을 보면 눈이 견디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죽음 직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을 ‘살아 있는 동일한 인간’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갑자기 모든 감각과 자기 의식이 끊겨 버린다면, 인간은 자기 연속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나는 여전히 나다’라고 느끼는 가운데 점차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 몇 시간은 그런 부드러운 이행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AC.170 문맥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특별히 심장과 호흡의 분리 과정에 주목합니다. 그는 인간 자연 생명의 중심이 심장과 호흡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단순히 심장이 멈추는 기계적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 호흡과 영적 의식 사이의 연결이 점차 풀리는 과정처럼 설명됩니다. 이 과정이 완전히 instantaneous하지 않기 때문에, ‘thought와 consequent perception만 남는 상태’가 얼마간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주님의 자비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주님은 인간을 abrupt하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천천히, 상태에 맞게,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죽음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갑자기 낯선 우주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자연 세계 감각을 놓고 영계 의식 안으로 옮겨집니다.

 

사실 이 설명은 매우 위로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찰나의 절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 아래 이루어지는 매우 세심한 transition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죽을 때, 혼자 통과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이 함께하며, 주님이 인간 의식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음 상태로 이끄신다고 봅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는 표현은 단순 시간 정보 이상으로, 죽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드러운 전이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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