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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심화 1, ‘겔32:2 속뜻에 대하여’

bygracetistory 2026. 6. 2. 20:02

AC.42.심화

 

1. 32:2 속뜻에 대하여

 

AC.42에서 겔32: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를 인용하면서 그 속뜻으로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라고 하는데요, 속뜻이라고는 하지만... 좀 어리둥절합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연결되는지요?

 

목사님, 이 대목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상응’이 한 단계가 아니라, ‘여러 층을 한 번에 겹쳐 읽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을 풀어 보려면, 구절 안에 있는 상징들을 하나씩 풀어서 다시 조합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째서 이것이 기억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사람인가?’가 또렷해집니다.

 

먼저 ‘애굽’(이집트)입니다. 스베덴보리 전체에서 ‘애굽’은 일관되게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뜻합니다. 즉, 외적인 지식, 경험, 학문, 논리, 감각에서 얻은 정보들입니다. 이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을 ‘출발점이 아니라 주인으로 삼을 때’입니다. 곧,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판단하고, 지식으로 신앙을 재단하려 할 때입니다.

 

다음으로 ‘바로 왕’입니다. 왕은 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원리, 주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이 지배자가 된 상태’, 곧 ‘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해가 아니라 지식이 왕이 된 상태’입니다.

 

이제 ‘큰 악어’(혹은 용, dragon, crocodile)가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인데, 스베덴보리에게서 이것은 ‘감각적이고 자연적인 인간의 가장 낮은 층, 그러나 동시에 교묘하고 교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힘 있고 크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감각과 자기 확신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있다’는 말이 붙습니다. 바다는 ‘지식과 개념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 곧 외적 이해의 영역입니다.

 

그다음 표현이 결정적입니다. ‘강에서 튀어 올라 물을 휘젓고 더럽힌다.’ 여기서 ‘’은 ‘보다 질서 있는 진리의 흐름’, 곧 말씀이나 교리에서 오는 진리의 흐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악어’가 그 물을 휘저어 더럽힙니다. 이것은 ‘자기 지식과 감각으로 진리를 뒤섞고 왜곡하는 상태’입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재단하고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애굽(지식)이 있고, 그 지식이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상태에서 감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악어)가 진리의 흐름(강)을 휘저어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으로 신앙을 해석하고 통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식을 사용하는 것’과 ‘지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올바른 순서입니다. 즉, 먼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고, 그다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즉,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신앙을 판단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AC.42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후자입니다.

 

실제적인 예로 설명드리면 더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이 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때 한 사람은 ‘아직 다 이해는 안 되지만, 이 말이 참일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인 뒤, 점점 이해해 갑니다. 이것은 ‘진리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들어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되나? 논리적으로 완벽히 설명되나?’를 먼저 따집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거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입니다. 겉으로는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을 흐리는 악어’와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그렇게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히 상징 몇 개를 억지로 맞춘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가 정확히 그 상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왕이 되고, 감각적 사고가 진리를 휘저어 흐리게 만드는 상태,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주님보다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이 바로 이 구절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경고로도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42는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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