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1, 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AC.191.심화
1. ‘감각적 증거를 구한다는 거’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Because from the love of self, that is, their own love, they began to believe nothing that they did not apprehend by the senses, (AC.191)
여기서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라, 영적 인식의 단절을 뜻합니다. 태고교회는 본래 내적 지각을 통해 진리를 알았으나, 자신의 own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지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감각적 증거를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이 전환이 곧 타락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AC.191 해설)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
네, 맞습니다. AC.191을 깊이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창3의 타락을 단순히 도덕적 범죄나 불순종 사건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는 타락의 시작을 ‘무엇을 행했는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기 시작했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감각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그것이 건전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C.191을 처음 읽으면 ‘그게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감각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 안에서 지각했고, 그다음 감각을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로 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플럭스가 먼저 있었고, 감각은 그 결과를 확인하는 가장 바깥 단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AC.191의 상태에서는 질서가 뒤집힙니다. 이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러한가 보다’가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믿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아주 합리적이고 건전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곧 영적 세계의 문을 닫는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천국, 사랑, 신앙, 양심, 인플럭스, 주님의 섭리 같은 것들은 본질적으로 감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고,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인 것 전체를 판단 불가능한 영역으로 밀어내 버립니다.
그래서 AC.191의 문제는 경험주의 자체가 아닙니다. 감각은 원래 주님께서 주신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감각을 최종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원래는 감각이 이해를 섬겨야 하는데, 이해가 감각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더 깊이 말하면,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감각을 비추어야 하는데, 이제는 감각이 주님의 빛을 심사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엄청난 문제인지 AC.195-196에 가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하나님을 눈으로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예로 듭니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감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해 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 원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과학주의나 무신론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응답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느낌이 와야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본질적으로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참된 신앙은 먼저 믿고 나서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나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나서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감각을 향하는 거, 감각적 증거를 구하는 거가 이렇게 근본적인, 엄청난 거군요!’라고 하신 말씀은 AC.191의 핵심을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사실 창3의 뱀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너무나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보는 타락의 시작은 음란이나 폭력이나 살인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훨씬 뒤의 결과들입니다. 가장 처음의 타락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감각을 판단하던 사람’이 ‘감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판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창3 전체는 바로 그 한 번의 방향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거대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 주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191은 짧지만, 실은 창3 전체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구절입니다.
AC.191, 창3:1-13, ‘창3의 인물들은 실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상’
개요 AC.191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들은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감각적인 부분은 ‘뱀’(serpent)으로, 자기 사랑, 곧 자기 own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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