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9, 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AC.199.심화
1. ‘나무’와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된 신앙의 선과 진리, 곧 신앙의 지식들[cognitiones]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동산 나무의 열매’(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고는 해도,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룰 때처럼 ‘동산 나무’(tree of the garden)라고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창2:16).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AC.199)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었음에도 그 안에 이런 엄청난 아르카나가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저도 AC.199 같은 대목을 읽을 때면 비슷한 놀라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근거로 삼는 것은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는 거의 지나쳐 버릴 만한 단어 하나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산 나무’와 ‘동산 나무의 열매’를 같은 뜻으로 읽고 넘어갑니다. 실제로 일반 독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는가?’를 묻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결과입니다. 그는 단순한 문체 변화나 우연한 표현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나무’는 지각 자체를, ‘열매’는 그 지각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창2에서는 태고교회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라고 하고, 창3에서는 그 후손들이 이미 직접 지각하는 상태에서 한 단계 내려와 지각으로부터 전해진 지식들을 배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산 나무의 열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관 전체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는 성경을 단순히 종교적 가르침이 담긴 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어 하나, 표현 하나, 심지어 접속과 순서까지도 영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곳에서 그는 엄청난 차이를 발견합니다.
목사님께서 놀라움을 느끼시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성경을 읽어 왔고, ‘나무’와 ‘열매’라는 표현도 셀 수 없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왜 여기서는 나무가 아니라 열매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차이가 ‘직접 지각하는 상태’와 ‘전해 받은 지식을 배우는 상태’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생각은 더욱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AC를 읽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교리 체계 때문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본문이 갑자기 입체적으로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였던 표현이 오늘은 전혀 다른 영적 상태를 구분하는 표지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냥 무심코 읽고 지나쳤던 표현들’이라는 말이 매우 공감됩니다. AC를 오래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성경 안에 이런 것이 들어 있었다는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만들어 낸 의미처럼 느껴지다가도, 일단 설명을 듣고 나면 오히려 본문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것이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AC 작업을 계속하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더 배우는 기쁨이라기보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던 말씀 속에서 계속 새로운 아르카나가 드러나는 경험 말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만 해도 이미 수십 년, 수백 번 읽었을 본문인데, AC를 통해 다시 읽으면 마치 전혀 다른 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199는 단순히 ‘나무와 열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왜 성경의 단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목들을 만날 때마다 ‘말씀 안에는 아직도 내가 전혀 보지 못한 깊이가 얼마나 더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정말 놀랍고 또 놀랍다’는 감탄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AC.199, 창3:2-3, ‘나무’와 ‘열매’, 태고교회의 상태 변화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And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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