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09, 창3:6, ‘창3의 표현들이 의지, 애정의 언어들인 이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창3:6)
AC.209
여기 사용된 표현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는 표현들은, 태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성향에 맞추어진 것들로서, 특별히 의지(will)와 관련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악은 의지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이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지만,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해설
이 본문은 매우 짧지만, 스베덴보리 인간론 전체의 핵심 구조가 들어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는 여기서 왜 창세기 3장의 표현들이 유난히 ‘욕망’, ‘즐거움’, ‘탐스러움’ 같은 의지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과 인간 구조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중심은 이해가 아니라 의지였습니다. 그들은 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고, 진리를 배우고 분석해서 선을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타락 역시 의지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통 먼저 잘못 생각하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먼저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자 지각이 흐려졌고, 그 결과 진리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3:6에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 의지와 애정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들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인간은 달라졌습니다. AC.200에서 이미 보았듯이, 주님은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인간 구조 자체를 바꾸셨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선에서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진리에서 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홍수 이후 사람들은 먼저 배우고, 이해하고, 분별한 뒤에 선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고,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전자는 사랑이 먼저이고 진리가 뒤따르는 구조이며, 후자는 진리가 먼저이고 선이 뒤따르는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태고교회를 다룰 때에는 의지와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고, 홍수 이후 교회들을 다룰 때에는 이해와 사고와 분별에 관한 표현들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체 차이가 아니라, 인간 구조 자체의 변화가 말씀의 언어에도 반영된 결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도 인간의 타락을 단순한 도덕적 문제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 안의 사랑과 진리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이 먼저였기 때문에 사랑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해가 먼저였기 때문에, 비록 더 낮은 상태에 살지만, 한편으로는 더 안전하게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AC.209는 창3:6의 표현들을 설명하는 해설인 동시에, 태고교회와 홍수 이후 인류를 가르는 거대한 전환점을 설명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는 시대’가 지나가고, ‘진리로부터 선을 배우는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후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언어를 읽을 때면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알았지만, 우리는 이해를 통해 배우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
그러나 말씀에서 홍수 이후 사람들을 다룰 때에는, 의지보다는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된 표현들이 사용됩니다.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AC.209)
혹시 저렇게 사용된 말씀의 예를 든다면?
좋은 질문입니다. AC.209를 읽으면 ‘의지와 관련된 표현’과 ‘이해와 관련된 표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의도한 차이를 가장 쉽게 보려면 창세기 3장과 홍수 이후 인물들, 특히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창3:6의 표현들을 보십시오.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랑, 욕망, 즐거움, 끌림 같은 의지의 언어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말씀도 그들의 내적 애정과 의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를 보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노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와 같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무엇이 옳은지 배우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보라’, ‘들으라’, ‘알라’, ‘기억하라’, ‘생각하라’, ‘깨달으라’와 같은 이해와 인식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이 나타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깨달으라’, ‘보아도 알지 못한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다’, ‘지혜와 명철’, ‘지식과 총명’ 같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의 이해와 판단, 분별과 관련된 언어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상태가 중심이었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도 흥미롭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생각하지 못하느냐?’ 같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지만, 접근 방식은 이해를 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 역시 홍수 이후 인류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태고 사람들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주로 말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진리로부터 선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씀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무엇을 이해하는가?’, ‘무엇을 분별하는가?’를 더 많이 말합니다.
그래서 AC.209의 요점은 단순히 문체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언어 자체가 인간 구조의 변화에 맞추어졌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의 언어가,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해의 언어가 더 적합했습니다. 그 결과 창3에서는 ‘먹기에 좋고’, ‘눈에 즐겁고’, ‘탐스럽다’가 중심이 되지만, 이후 말씀에서는 ‘듣다’, ‘알다’, ‘깨닫다’, ‘명철’, ‘지혜’, ‘총명’ 같은 표현들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208, 창3:6,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And the woman saw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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