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4, 창3:8, ‘숨은지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창3:8)
AC.224
자비(mercy), 평화(peace), 그리고 모든 선(good), 곧 ‘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지각(perception)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적 딕테이트(internal dictate)의 원인이 되며, 또한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양심(conscience)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자비롭게 작용하지만, 사람이 처해 있는 상태에 따라 받아들여집니다. 이 사람, 곧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의 이 후손의 상태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의 상태였습니다.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벗었음을 알게 되면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숨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선마저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숨지도 않습니다. 그들에 관하여는 예레미야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 13)
해설
AC.224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아담이 숨은 것은 완전한 악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어느 정도의 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더 깊이 들어갑니다. 사실 완전히 악에 빠진 사람은 숨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숨는다는 것 자체가 아직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자연적 선은 아직 영적 선(spiritual good)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선한 성향, 도덕적 감각, 수치심, 양심에 대한 반응 등을 포함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비록 타락하였지만, 아직 이 자연적 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 곧 자비와 평화와 선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그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악마적인 공포가 아니라 양심의 불편함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직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은 것입니다.
반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사람들은 훨씬 더 깊이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습니다. 즉 양심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진단 기준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마음이 불편하거나, 말씀을 읽다가 찔림을 받거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희망적인 상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잘못을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로 그 상태를 묘사합니다. 포도도 없고 무화과도 없으며 잎사귀마저 마른 상태입니다. 즉 선의 열매도 없고 진리의 열매도 없으며, 외적 신앙의 흔적조차 말라 버린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주님의 자비와 평화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의 얼굴들’(the faces of Jehovah)은 언제나 동일하게 자비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사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평안으로 느끼고, 회개하는 사람은 그것을 양심의 책망으로 느끼며, 완전히 악한 사람은 그것을 불편함으로 느낍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입니다.
결국 AC.224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담이 숨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여전히 주님의 음성을 의식할 수 있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벗음(nakedness)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남아 있는 선의 흔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양심의 아픔은 종종 영적 생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진정으로 위험한 상태인 것입니다.
심화
1. ‘렘8:12-13’
AC.224, 심화 1, ‘렘8:12-13’
AC.224.심화 1. ‘렘8:12-13’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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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심의 흔적’
AC.224, 심화 2, ‘양심의 흔적’
AC.224.심화 2. ‘양심의 흔적’ 창3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으며,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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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5, 창3:8, ‘동산 나무 사이’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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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3, 창3:8, ‘여호와 하나님의 낯’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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