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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6, 창3:19, ‘먹을 것’

bygracetistory 2026. 7. 14. 11:45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19)



AC.276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의 의미가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먹을 것(bread)의 의미로부터 분명합니다. ‘먹을 것은 모든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천사들의 양식입니다. 만일 그것이 박탈된다면 천사들은 사람이 빵(bread, 먹을 것, 떡, 양식)이나 음식을 빼앗기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천국의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땅의 빵과 상응하며, 그래서 말씀의 많은 곳에서 빵으로 표상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이신 이유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인데,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That to “eat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ignifies to be averse to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bread.” By “bread” is meant everything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is the food of the angels, on the deprivation of which they would cease to live as certainly as men deprived of bread or food. That which is celestial and spiritual in heaven also corresponds to bread on earth, by which moreover they are represented, as is shown by many passages in the Word. That the Lord is “bread,” because from him proceeds whatever is celestial and spiritual, he himself teaches in John: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6:58)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 (John 6:58).

 

그러므로 성만찬에서도 빵과 포도주가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또한 이 천적인 것은 만나로도 표상되었습니다.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천사들의 양식이라는 사실은 주님의 다음 말씀으로도 분명합니다. Wherefore also bread and wine are the symbols employed in the holy supper. This celestial is also represented by the manna. That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constitutes the food of angels is manifest from the Lord’s words: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Matt. 4:4),

 

곧 사람은 주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그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that is, from the life of the Lord, from which comes everything celestial and spiritual.

 

[2] 홍수 직전에 존재했던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 곧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이신지, 그분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가 언급되면 그들은 등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혐오와 반감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천적인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적, 세속적 메시아만을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을 표상하는 만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렀고, 그 때문에 불뱀들이 그들 가운데 보내졌습니다 (21:5-6). The last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immediately before the flood, and is here treated of, had become so thoroughly lost and immersed in sensuous and bodily things, that they were no longer willing to hear what was the truth of faith, what the Lord was, or that he would come and save them; and when such subjects were mentioned they turned away. This aversion is described by “eating bread in the sweat of the face.” So also the Jews, in consequence of their being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did not acknowledge the existence of heavenly things, and desired only a worldly messiah, could not help feeling an aversion for the manna, because it was a representation of the Lord, calling it “vile bread,” on which account fiery serpents were sent among them (Num. 21:5, 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5, 6)

 

또한 사람들이 환난과 비참함 가운데 있어 눈물로 천적인 것들을 받게 될 때, 그것들은 그들에 의해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혐오감을 가지고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흘린 땀의 빵(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Moreover the heavenly things imparted to them in states of adversity and misery, when they were in tears, were called by them the “bread of adversity,” the “bread of misery,” and the “bread of tears.” In the passage before us, that which was received with aversion is called the “bread of the sweat of the face.”

 

 

※ 아래는 저런 여러 종류의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의 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30:20)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the bread of misery)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왕상22:27)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16:3)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80:4, 5)

 

 

해설

 

AC.276에서 스베덴보리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먹을 것’은 단순한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 곧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적 양식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는 사람이 이러한 천적인 것들을 기쁨과 평안 가운데 받아들였던 반면, 타락 이후에는 그것들을 환난과 수고, 눈물 가운데서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3:19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환난의 떡’(the bread of adversity),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 ‘눈물의 양식’(the bread of tears)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적인 것 자체가 고난이나 비참함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언제나 선하고 평화롭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사람 안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강해질수록, 주님의 진리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과 아픔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하는 먹을 것’은 고난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는 영적 양식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사30:20의 ‘환난의 떡’은 징계와 환난 가운데서 사람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도록 주어지는 영적 양식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시80:5의 ‘눈물의 양식’도 눈물과 회개 가운데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적 양식을 나타냅니다. 즉, 고난과 눈물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주님께 이끄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고생, 고난의 떡’(the bread of misery)은 특정한 한 구절을 직접 가리킨다기보다,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는 ‘고난의 떡’, ‘환난의 떡’과 같은 표현들을 종합하여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특정한 표현을 구분하는 데 있지 않고, 타락한 인간은 천적인 것들을 더 이상 평안 가운데 받지 못하고, 환난과 비참함, 그리고 눈물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순조롭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을 때에는 주님의 진리를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질병, 상실과 유혹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같은 말씀인데도 이전에는 부담으로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위로와 생명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3:19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은 노동의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제 영적인 생명도 수고와 유혹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타락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own과 끊임없이 싸우는 가운데서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땀은 바로 그 영적 투쟁을 상징합니다.

 

AC.276의 핵심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인 것은 언제나 생명의 양식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생명의 ‘먹을 것’이, 타락 이후에는 ‘환난의 떡’, ‘고생, 고난의 떡’, ‘눈물의 양식’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달라지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환난과 눈물마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셔서, 사람이 다시 생명의 떡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AC.276이 전하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희망입니다.

 

 

심화

 

1. ‘요6: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6:58) This is the bread that cometh down from heaven; he that eateth of this bread shall live to eternity (John 6:58).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요6:58을 인용하는 이유는, 말씀에서 ‘먹을 것’(bread)이 단순한 육체적 음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곧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창3:19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먼저 ‘먹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이 구절을 가장 직접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십니다.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여기서의 떡이 물질적인 음식이라면 이 말씀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떡은 영적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선, 그리고 진리의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주님은 단순히 떡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떡 자체이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모든 선과 진리, 모든 사랑과 지혜가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양식도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이며, 사람의 영혼 역시 같은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무엇을 섭취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성만찬의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성만찬의 떡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선(Divine Good)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떡을 떼어 나누는 행위는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먹을 것‘은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창3:19을 보면,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이 더 분명해집니다. 먹을 것은 본래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천적인 것이지만, 타락한 사람은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천국의 것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하던 상태를 잃어버리고, 마치 힘겨운 노동 끝에 억지로 먹을 것을 먹는 것처럼 그것들을 어렵고 부담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6:58을 인용한 이유는, ‘떡’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신적 선과 천적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가 확립되어야만 창3의 ‘먹을 것을 먹는다’는 말씀이 단순한 육체적 생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생명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주님 자신이 인간과 천사의 참된 양식이심을 보여주며, AC.276 전체 해석의 기초가 되는 핵심 증거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4:4)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Matt. 4:4),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마4:4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참된 생명이 물질적 음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천적 생명에서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먹을 것’(bread)이 모든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이 구절은 그 해석을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직접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떡’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자연적 양식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는 영적 양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인간에게 육체적 생명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이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문자나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명과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살아가는 것도 바로 이 생명 때문이며, 인간 역시 내적 인간, 즉 속 사람을 통해 이 생명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AC.276의 중심 논점과 직접 연결됩니다. 창3:19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에서 먹을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러한 천적인 것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영적 양식보다 자연적 양식만을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오직 세상적이고 감각적인 것만으로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광야 시험에서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상태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육체의 필요보다 먼저 영적 생명을 두셨고, 인간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떡’의 참된 의미를 설명합니다. 참된 떡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이며, 참된 삶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AC.276에서 인용된 이유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인간과 천사의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육체의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창3의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은 단순한 노동의 어려움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양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게 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3. ‘민21:5-6’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민21:5, 6)

 

 

AC.276에서 스베덴보리가 민21:5-6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싫어하게 될 때 어떤 영적 상태에 빠지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앞에서 ‘먹을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영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르며 싫어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천적 양식에 대한 혐오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만나는 단순한 광야의 식량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만나는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천적 선과 영적 진리를 표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6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만나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만나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하늘에서 주어지는 양식보다 감각적이고 세상적인 만족을 더 원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음식 불평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이 사건은 인간이 영적 생명을 거부하고 자연적, 세속적 삶만을 원하게 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신앙의 진리와 장차 오실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천국의 것보다 세상의 것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만나를 혐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불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에서 뱀은 감각적 인간(sensuous man)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불뱀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타오르는 욕망과 거짓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불뱀이 백성을 무는 것은 주님께서 임의로 벌을 내리셨다는 뜻이라기보다, 천적인 것을 거부한 결과 감각적 욕망과 자기 사랑이 더욱 강하게 사람을 지배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특히 AC.276의 문맥에서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이 사용됩니다. 본래 천적인 것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타락한 사람은 그것을 부담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양식조차 싫어하게 됩니다. 만나는 변한 것이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변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천적인 것에 대한 혐오와 거부가 얼마나 심각한 영적 상태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이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거부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창3에서 말하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상태, 곧 천적 생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하게 된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인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AC.275, 창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AC.275-27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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