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AC 창3

AC.294, 창3:21, ‘가죽옷‘과 체어리티, 그리고 양(sheep)

bygracetistory 2026. 7. 20. 09:4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1)

 

AC.294

 

또한 가죽옷(coat of skin)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한다는 것도,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나오는 구절들을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분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가죽(skin)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염소 새끼나 양, 숫양의 가죽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은 말씀에서 선에 대한 애정(affections)과 체어리티(charity),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의미하며, 희생 제사에 사용된 양들도 역시 같은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지닌 사람들을 (sheep)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양들의 목자(shepherd of the sheep)라 일컬음을 받으시며,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sheep)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해설

 

AC.29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 글의 논의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킵니다. 앞에서는 ‘가죽옷’에 내적 의미, 곧 속뜻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왜 그것이 영적 선과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를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의 구절만 떼어 놓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상응의 법칙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먼저 ‘속뜻의 계시와 함께, 이어지는 말씀의 여러 구절을 서로 비교하지 않고서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그 말씀의 속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계시에 따라 말씀 전체를 서로 비교하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속뜻은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기초로 하여 말씀 전체의 일관성을 통해 검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언제나 창세기만 설명하지 않고, 시편과 선지서, 복음서 등 말씀 전체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

 

이어서 그는 여기서 사용된 ‘가죽’이 아무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 실제 의미로는 염소 새끼와 양, 그리고 숫양의 가죽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설명입니다. 성경에서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은 아무 동물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특별히 지정하신 동물들, 곧 모두 특정한 선과 진리를 상징하는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그 가죽 역시 같은 상응을 지닙니다. 창세기 본문은 단순히 ‘가죽’이라고만 기록하지만, 속뜻으로는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깨끗한 짐승의 가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 양(sheep)과 숫양(ram)일까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이 동물들은 모두 선에 대한 애정과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특히 양은 체어리티 자체를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동물입니다. 체어리티란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양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내며, 숫양은 그러한 선이 보다 힘 있게 작용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가죽은 그러한 선이 가장 바깥 삶 속에 나타난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앞 절의 ‘가죽옷’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죽은 몸의 가장 바깥을 덮는 것이며, 양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체어리티의 선이 인간의 겉 생활, 그러니까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태고교회는 처음처럼 천적 퍼셉션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은 단순한 보호의 상징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해석의 근거로 주님께서 스스로를 ‘선한 목자(10:11)라 하신 사실을 제시합니다. 만일 양이 단순히 동물에 불과하다면, 주님께서 사람들을 ‘’이라 하시고, 자신을 ‘선한 목자’라 하신 말씀은 깊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양이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목자는 그들을 사랑과 진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선한 목자’와 창3의 ‘가죽옷’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상응 원리 위에 서 있는 말씀입니다.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것처럼 창3:20-24를 태고교회의 흥망성쇠를 압축한 요약, 결론으로 이해하면, 이 글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상태를 잃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체어리티의 삶을 다시 가르치시고, 그 삶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창3:21은 단순히 수치를 가리는 장면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AC.294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상응 체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죽옷’, 희생 제사의 ‘’, 복음서의 ‘’과 ‘선한 목자’는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문맥에서 기록되었지만 모두 하나의 영적 진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체어리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양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입히시며, 끝까지 목자처럼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타락 이후 인간이 입게 된 가장 외적인 옷이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은혜의 옷이기도 합니다.

 

 

 

AC.293, 창3:21, ‘가죽옷 이야기‘, 우리를 속뜻의 세계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AC.293 이러한 의미들은 말씀을 겉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더 깊은 의미가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