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1, 심화 6, ‘자살’
AC.301.심화
6. ‘자살’
‘자살’의 경우, 사후 ‘이 사람은 참 괜찮은 삶을 살았는데 순간 판단 실수로 자살했으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여 구원받는 경우가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종합해 보면, 오히려 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후에 들어가는 상태는 죽는 마지막 몇 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지배적인 사랑(dominant love)에 의해 결정된다고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죽음은 그 상태를 드러내는 계기이지, 그것을 새로 만들어 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살았으며, 선량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혼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살했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 한순간만으로 그의 평생의 내적 상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후에 그는 처음 며칠 동안 천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점차 평정을 되찾고, 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있었던 혼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AC.182 이하에서 보듯이, 주님은 사람이 죽는 순간의 충격 속에서도 사랑의 가장 내적인 부분을 보호하십니다. 그 보호는 죽음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무엇이 살아 있었는가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자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평생 악한 삶을 살다가 자연사한 사람과, 평생 선하게 살다가 마지막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자살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기준은 사망 원인이 아니라 평생 형성된 사랑입니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일부 교회에서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가르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언제나 그 사람의 전체 삶과 의지의 방향에 둡니다.
물론 이것이 자살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자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며, 많은 경우 깊은 절망과 혼란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비극 자체가 곧 영원한 정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일반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십니다. 어떤 이는 순간의 극심한 절망 속에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평생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한 양심이 살아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후에는 지상의 혼란에서 벗어나 참된 상태가 드러나며, 모든 판단은 완전한 공의와 동시에 완전한 자비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 답변은 AC.182 이하에서 보이는 ‘죽은 직후 이어지는 천사들의 보호’, HH에서 반복되는 ‘지배적 사랑에 따른 사후 상태’, 그리고 스베덴보리 전체 신학의 큰 원리와도 잘 일치합니다. 오히려 이런 관점은 유가족들에게도 막연한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매우 중요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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