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08, 창3:24, ‘그룹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8
앞에서 ‘동쪽’(east)과 ‘에덴동산’(garden of Eden)의 의미를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 다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룹들’(cherubim) 말인데요, 이것은, 만일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자신의 own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the mysteries of faith) 안으로 미친 듯이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그룹들’이 언급되는 모든 구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quality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 모형들이 주님을 상징함, 사후의 삶,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 등 이런 것들에 관하여 밝히 알게 되는 순간, 이들은 분명 그것을 profane, 그렇게 해서 결국 영원히 멸망하였을,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궤 위 속죄소(the mercy seat over the ark)에 있는 ‘그룹들’(cherubim), 성막 휘장들(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에 있는 그룹들, 휘장(the veil)에 있는 그룹들, 그리고 성전(the temple)에 있는 그룹들로 표상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지켜 보존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Exod. 25:18–21; 26:1, 31; 1 Kings 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증거판(the testimony)이 들어 있던 궤는 이 구절(창3:24)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와 같은 것을 의미하였는데, 곧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자주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으로 일컬음을 받으셨고, 또한 그룹들 사이에서(between the cherubim)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Exod. 25:22; Num. 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7:89)
이것은 에스겔에서 분명하게 묘사되는데, 거기 보면,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겔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겔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이 구절들을 통해 ‘그룹들’(cherubim)은 사람들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the Lord)를 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광적 욕망(insane cupidities)에 내맡겨졌는데, 이것을 여기서는 ‘성읍 위에 흩어질 불’(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과 ‘아무도 아끼지 말라’(none should be spared)는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해설
AC.308은 창3:24의 ‘그룹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본격적으로 밝히는 글입니다. 앞의 AC.306에서는 그룹들이, 거룩한 것에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 간단히 설명하였고, AC.307에서는 홍수 직전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잃고, 광적 욕망과 persuasion에 내맡겨진 상태를 다루었습니다. 이제 AC.308은 왜 거룩한 것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자비로운 보호인지를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먼저 이 글에서 ‘그룹들’은 어떤 특별한 계급의 천사들을 단순히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사고, 그리고 기억 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 그것들을 모독, profanation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겸손과 선한 애정 없이 자기 지성과 감각적 판단만으로 거룩한 것들을 장악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룩한 진리를 자기 안에서 받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고 지배 및 이용하려 합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에 속한 것들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감각과 기억 지식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 유용한 수단이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속 사람의 빛을 섬길 때에는 진리를 확인하고 삶에 적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순서가 뒤집혀 감각적 증거와 기억 지식이 신앙의 진리를 재판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사람은 천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 아래에 두게 됩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부정하고, 감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 여기며, 자기 지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거룩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진입을 ‘광적으로’, 그러니까 미친 듯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연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거룩한 것을 자기 소유로 삼고, 자기 판단에 복종시키며, 자기 목적에 이용하려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악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진리를 이용합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의 아르카나는 그 사람 안에서 모독, 곧 profanation 됩니다.
profanation은 거룩한 것을 단순히 모르거나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입니다. profanation은 사람이 먼저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 다시 그것을 부정하거나 악한 삶과 뒤섞을 때 생깁니다.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런 상태에 이를 위험이 있을 때, 오히려 더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하시고, 더 깊은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유대인들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AC.308은 유대인들이 만일 주님의 오심, 교회의 표상과 모형들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사실,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명백한 지식을 가졌더라면 그것을 profane 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 민족 전체를 단순히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그러니까 유대교회의 표상적 기능과 그들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외적 예배와 의식은 매우 철저히 지켰지만, 그 안에 있는 주님과 천국, 그리고 거듭남의 의미를 받아들일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 내적 의미가 분명하게 열렸다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거룩한 것을 행하면서 내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하여 그것을 이용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깊은 profanation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적 예배는 허락하셨지만, 그 표상들의 깊은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성막과 성전의 모든 기물과 의식은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관한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외적인 명령과 의식으로만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를 주지 않으신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아 나중에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룹들이 속죄소 위에, 성막 휘장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그리고 성전 벽과 문에 새겨졌습니다.
특히 궤 위 속죄소의 두 그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고, 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으며, 그 위에 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었습니다. 증거궤는 말씀과 신적 진리를, 더 깊게는 주님 자신과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AC.308은 이 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하는 것처럼, 증거궤도 주님과 오직 주님께만 속한 천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룹들이 속죄소를 날개로 덮고 그 얼굴을 속죄소를 향한 것은, 신적 거룩함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주님으로부터 떼어 내어 사람에게 감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동시에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거룩한 진리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와 방법에 따라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함부로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막으시지만, 사람이 겸손히 주님으로부터 받고자 할 때에는 필요한 만큼 말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점에서 그룹은 단순한 차단의 상징이 아니라, 계시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습니다. 궤도 감추어져 있지만,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룹의 기능은 사람을 영원히 진리 밖에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진리를 모독하지 않으면서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거룩한 것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성막의 휘장들과 성전 벽에 그룹들이 수놓아지고 새겨진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휘장은 성소의 여러 단계와 경계를 나타내며, 무엇이 더 내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외적인 것인지를 구분합니다. 그룹들이 그 경계에 놓였다는 것은 사람이 외적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뛰어들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점차 준비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거듭남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기억 지식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체어리티에서 주님 사랑으로 한 단계씩 인도됩니다. 자기 지성으로 이 질서를 건너뛰려 하면, 거룩한 것을 이해하는 대신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AC.308이 겔9와 10을 인용하는 이유는 그룹들의 보호 기능이 단순히 평화로운 성전 장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겔9에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은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가고,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표가 그어집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임합니다. 여기서 이마의 표는 사람의 사랑과 의지 안에 주님의 선이 남아 있음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성읍과 성전에 있어도, 속으로 악을 슬퍼하고 거부하는 사람과 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겔10에서 그룹들 사이의 불이 성읍 위에 흩어지는 장면도 같은 원리를 보여줍니다. 불은 그 본래 의미에서는 사랑을 뜻하지만, 악한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의 불을 뜻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악한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뒤집혀 자기 사랑의 불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성읍 위에 흩어지는 불은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진 결과 그 욕망이 그들을 심판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AC.308의 마지막 문장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받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광적 욕망에 내맡겨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악을 원하시거나 그들을 악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미 거룩한 것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므로, 더 깊은 진리를 열어 주어 profanation을 증가시키기보다 그들이 선택한 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수준에 머물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같은 지옥 상태로 향하더라도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인해 더욱 악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제한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아끼지 말라’는 표현도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혹한 심판처럼 보이지만,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이 완전히 성숙하여 더 이상 선과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킨 것입니다. 심판은 주님에게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세상에서 악이 곧바로 제거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없애면서까지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자유가 사라지면 회개와 거듭남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악을 허용하시되, 그 악이 무한히 커지지 못하도록 제한하시고,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파멸을 가능한 한 줄이시며, 더 깊은 profanation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섭리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창3:24의 그룹들은 단순히 타락한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쫓아내는 무서운 문지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함부로 다루어 자기 자신을 영원히 파멸시키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 길은 닫힌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으며, 사람은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 그 길을 침범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질서 안에서는 다시 그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AC.308의 중심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룹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심판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표상이고, 차단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보존의 표상이며,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그 자유가 영원한 파멸로 치닫지 않도록 끝까지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심화
1. ‘출25:18-21’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18-21)
출25:18-21이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함부로 접근, 그것을 profanation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그룹들이 어디에 놓였으며, 무엇을 덮고 있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가 매우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모든 배치가 AC.308의 중심 메시지를 드러냅니다.
먼저 그룹들은 증거궤 위의 ‘속죄소’(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두 끝에 놓였습니다. 증거궤 안에는 증거판, 곧 십계명이 들어 있었으므로, 증거궤는 말씀의 신적 진리와 더 깊게는 신적 진리이신 주님을 표상합니다. AC.308은 이 증거궤가 창3의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밝힙니다. 곧 생명나무와 증거궤는 모두 주님과 오직 주님께 속한 천적인 것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증거궤 위에 놓였다는 것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것들이 주님의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속죄소와 별도로 만들어져 나중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속죄소 자체에서 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별도의 조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속죄소(the mercy seat)는 주님의 자비와 죄 사함을 표상하고, 그룹들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냉혹한 차단이나 배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보호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접근을 제한하시는 것 자체가 속죄소가 나타내는 주님의 자비에 속합니다.
또한 그룹들은 날개를 높이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었습니다. 말씀에서 ‘날개’는 보호와 능력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덮어 지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덮음’은 거룩한 것을 완전히 없애거나 영원히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 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진리를 주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상태와 질서에 따라 진리를 열어 주십니다.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깊은 진리가 감추어지는 것은 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면서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바깥을 향하거나 사람을 위협하는 방향을 향하지 않고, 속죄소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공격하거나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속죄소가 표상하는 주님의 자비와 거룩함을 섬기고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의 모든 자세와 방향은 주님의 자비를 중심으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단순한 심판의 표상이 아니라, 자비로운 섭리의 표상입니다.
속죄소가 증거궤 위에 놓이고, 증거판이 궤 안에 들어 있다는 구조도 중요합니다. 가장 안쪽에는 증거판이 있고, 그 위에는 속죄소가 있으며, 속죄소 위에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적 진리의 가장 내적 거룩함이 주님의 자비로 덮여 있고, 그 자비의 질서 안에서 섭리로 보호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곧바로 가장 내적인 신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섭리를 통하여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지성과 감각으로는 증거판이 표상하는 신적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질서 안에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또한 그룹들이 단순히 접근을 막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고 말씀하시는 장소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다음 절인 출25:22에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고 말씀하시겠다 하십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있다는 것은 계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시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보호되고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own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를 침범해서는 안 되지만, 주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곧 주님의 섭리가 정한 질서와 한계 안에서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AC.308이 특별히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관련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증거궤와 속죄소와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명백히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내적 의미를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위한 외적 예배를 계속하였다면, 그 거룩한 진리를 profane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표상은 허락하셨으나 그 속뜻은 감추셨습니다. 속죄소 위의 그룹들은 바로 이러한 보호를 가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창3:24의 그룹들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고, 출25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증거궤와 속죄소를 덮어 지키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 own으로부터 주님과 천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증거궤의 거룩함도 파괴되거나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룹들 아래에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도, 장차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시 그것을 받을 가능성을 보존하시는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출25:18-21이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증거궤와 증거판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신적, 천적인 것들을, 속죄소는 주님의 자비를, 그 위에서 날개로 덮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own)과 감각, 그리고 기억 지식으로 그 거룩함을 침범하여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더욱이 그룹들이 속죄소와 한 덩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제한과 보호가 주님의 자비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비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금지와 차단의 표상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지키시는 주님의 ‘보호하시는 자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AC.308에 인용된 것입니다.
2. ‘출26:1, 3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출26:1, 31)
출26:1, 31이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가장 안쪽의 증거궤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룩한 것에 접근하는 모든 과정과 경계를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성막의 휘장은 단순히 공간을 나누거나 성막을 덮는 천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성막 전체가 천국과 교회, 그리고 거듭난 사람을 표상하며, 성막 안의 여러 공간과 기물은 사람 안에 있는 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휘장은 서로 다른 영적 상태와 단계를 구분하는 경계를 뜻합니다. 사람은 외적인 상태에서 곧바로 가장 내적인 거룩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AC.308은 이 사실을 통해, 거룩한 것에 대한 주님의 보호가 증거궤나 지성소와 같은 가장 내적인 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처음 접하는 외적 단계에서부터 가장 깊은 천적인 것에 가까이 가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함께합니다. 사람이 어느 단계에서든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거룩한 것을 침범, 왜곡하거나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출26:1의 열 폭 휘장은 성막 전체를 이루는 가장 안쪽의 휘장들입니다. 이 휘장들 위에 그룹들이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것은, 성막 전체, 곧 천국과 교회의 질서 전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보호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룹들은 어느 한 출입구에만 서 있는 문지기가 아니라, 거룩한 질서 전체에 두루 존재하는 보호의 표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것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것을 보존하고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도 함께 있습니다.
출26:31의 휘장은 특별히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입니다. 지성소는 주님의 가장 직접적인 임재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졌다는 것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깊은 신적, 천적인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막혀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막힘은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을 알고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창3:24의 ‘생명나무의 길’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창3에서는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으며, 출26에서는 그룹들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지성으로 가장 내적 거룩함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생명나무의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지고 있듯이, 지성소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휘장 뒤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휘장에 사용된 재료와 색들도 이 의미를 더 깊게 합니다. 가늘게 꼰 베 실은 선에서 나온 순수한 진리를, 청색은 천적인 것에 대한 애정을, 자색은 천적 선을, 홍색은 영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선과 진리로 이루어진 천국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선과 진리의 조직 속에 그룹들이 함께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선과 진리의 질서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 안에 내재하여 거룩한 것을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룹들이 휘장 위에 ‘정교하게 수놓아졌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그룹들은 완성된 휘장 위에 나중에 붙인 별도의 장식물이 아니라, 휘장의 직조 과정에서 그 무늬 안에 함께 짜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후에 덧붙여진 임시 조치가 아니라, 천국과 교회의 질서 안에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는 보호의 원리임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악이 생긴 뒤에야 뒤늦게 대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모든 상태와 가능성을 보시고, 사람을 보호하는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출26:1의 휘장들과 출26:31의 휘장은 서로 다른 범위에서 같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열 폭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성막 전체와 그 안의 모든 거룩한 것이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나타내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위에 그룹들이 수놓아진 것은 특별히 가장 내적 거룩함에 대한 접근이 주님의 질서에 따라 제한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는 전체적인 보호를, 다른 하나는 가장 내적 경계에서의 보호를 보여줍니다.
이 인용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성막과 휘장과 그룹들을 외적으로는 보고 사용하였지만, 그것들이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의 내적인 것들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AC.308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에게 내적 진리를 주시지 않은 냉혹한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profane 하지 않도록 하신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 표상과 의식은 허락되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의 오심, 사후의 삶, 속 사람, 말씀의 속뜻에 관한 명백한 지식은 감추어졌습니다.
이러한 감춤은 휘장의 기능과 정확히 상응합니다. 휘장은 지성소를 없애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게 하며, 동시에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내적인 거룩한 것들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휘장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그 거룩한 것들과 표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을 명백히 이해하고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악한 상태에서 더 깊은 profanation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보호였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은 단순한 차단이나 단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휘장은 한편으로는 경계를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경계 안쪽에 있는 거룩한 것을 보존합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에는 가리고 막지만, 주님께서 정하신 때와 질서가 되면 열릴 수 있는 경계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강림과 인성의 신성화가 완성되었을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장 내적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열렸음을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길 역시 사람의 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통하여 열립니다.
또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지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감추는 데만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만큼은 받게 하시고, 받을 수 없는 것은 감추시며, 그가 더 준비되면 다시 더 내적인 것을 열어 주십니다. 거듭남의 모든 과정은 이러한 열림과 감춤의 반복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천적인 아르카나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외적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행하며, 체어리티 안에 들어간 뒤에야 더 내적 진리가 열립니다.
따라서 그룹들이 휘장 위에 수놓아졌다는 것은 거듭남의 각 단계 사이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기억 지식을 많이 쌓았다 해서 곧바로 내적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신앙에 관한 많은 교리를 안다고 해서 천적 사랑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만 그다음 단계의 것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룹들이 휘장의 경계마다 있는 이유입니다.
AC.308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직접적인 목적은 ‘그룹들’이 사람의 신앙 탐구 자체를 막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 지식으로부터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광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습니다. 휘장 위의 그룹들은 사람이 주님의 질서를 거치지 않고, 가장 내적 거룩함에 접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것은 연구의 대상이기 이전에 삶으로 받아야 할 것이며, 자기 지성으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출26:1, 31이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성막 전체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경계에 새겨져 있음으로써, 주님의 섭리가 거룩한 것을 보호하고, 사람의 접근을 질서 있게 조절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룹들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표상이 아니라, 그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않도록 지키며, 장차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더 내적인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자비의 표상입니다.
3. ‘왕상6:23-29, 32’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왕상6:23-29, 32가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성전의 가장 안쪽인 내소 뿐 아니라 내소와 외소의 벽과 문에까지 새겨진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깊은 거룩한 것에서부터 교회의 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출25의 그룹들이 증거궤와 속죄소 위에서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지키고, 출26의 그룹들이 성막의 휘장과 경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왕상6의 그룹들은 그 보호가 성전 전체의 구조 안에 확장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두 그룹은 ‘내소 안’에 놓였습니다. 내소는 성전의 가장 안쪽 방인 지성소이며,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선과 가장 내적인 천적 천국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내소 가운데 놓인 두 그룹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및 기억 지식으로 가장 내적인 신적, 천적인 것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창3:24에서 그룹들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생명나무가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 생명을 뜻하듯, 성전의 내소도 주님의 가장 깊은 임재와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곳에 그룹들이 놓인 것은 AC.308의 설명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합니다.
두 그룹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감람나무는 천적 사랑의 선, 곧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가장 내적 선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감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가 두려움이나 정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적 사랑의 선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배척하거나 지식을 독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룩한 것을 profane,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사랑으로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룹의 보호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보호입니다.
각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고, 날개 끝에서 끝까지도 십 규빗이었다는 점은 그 보호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십’(10)은 리메인스와 충만한 상태를 뜻하며, 여기서는 주님의 섭리가 부분적이거나 우연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전체를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그룹의 크기와 모양이 같았다는 것도 같은 의미를 강화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서로 모순되거나 불균형하게 작용하지 않고, 신적 질서 안에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작용합니다.
그룹들의 날개가 내소 전체를 가득 채웠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합니다. 한쪽 그룹의 바깥 날개는 한쪽 벽에 닿고, 다른 그룹의 바깥 날개는 반대편 벽에 닿았으며, 안쪽 날개들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습니다. 따라서 내소 안에는 그룹들의 날개가 미치지 않는 공간이 없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 거룩함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감싸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주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거나 어떤 곳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주님의 보호는 가장 내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바깥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미치고 있습니다.
‘날개’는 말씀에서 능력과 보호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날개가 벽에서 벽까지 펼쳐졌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호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보호는 거룩한 것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폐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으로부터 거룩한 것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보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히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만큼 열리지만, 자기 지성과 감각적 추론으로 침입하려는 사람에게는 닫히는 것입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룹들은 서로 분리되어 각자 한쪽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보호 질서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서로 무관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마지막, 가장 안쪽과 가장 바깥쪽, 선과 진리가 하나의 목적 아래 결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주님과 천국에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룹들이 금으로 입혀졌다는 사실은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말씀에서 ‘금’은 천적 사랑의 선을 뜻합니다. 그룹의 재료인 감람나무도 천적 사랑의 선을 표상하고, 그 위에 입힌 금도 같은 천적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의 안과 밖이 모두 사랑의 선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사람의 접근을 제한하고 거룩한 것을 감추시는 주님의 섭리가 겉으로는 엄격한 금지처럼 보여도, 그 안과 밖의 본질은 모두 신적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제한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취하는 보호의 형식입니다.
왕상6:29에서는 내소와 외소의 사방 벽에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 형상이 아로새겨졌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그룹들의 의미를 지성소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내소’는 교회와 사람의 더 내적인 것들을, ‘외소’는 그보다 외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내소와 외소의 모든 벽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가장 내적인 천적 상태뿐 아니라 영적 상태와 자연적 상태에도 두루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느 단계에 있든 주님의 섭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진리를 받는 사람도 보호받고, 아직 외적 진리와 예배 안에 있는 사람도 그가 profanation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습니다.
벽에 새겨진 ‘종려’와 ‘핀 꽃’도 그룹들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려는 선에서 나오는 영적 진리와 그 승리를, 핀 꽃은 진리와 지식이 처음 생겨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그룹들과 종려, 그리고 핀 꽃이 함께 새겨진 것은, 주님의 섭리가 단순히 거룩한 것의 접근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자라고 열매 맺도록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그룹은 생명을 차단하는 표상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자라도록 지키는 표상입니다.
그룹들이 내소와 외소 사방 벽에 새겨졌다는 것은 주님의 섭리가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에 함께한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사람 안에서 진리가 꽃처럼 처음 피어날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하며, 그 진리가 선과 결합, 종려가 표상하는 승리와 열매에 이를 때에도 주님의 섭리가 보호합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가 너무 일찍 열리지 않도록 하시고, 이미 받은 진리를 악한 삶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때로는 그 진리에 대한 기억이나 이해를 흐리게 하심으로써 더 깊은 profanation을 막기도 하십니다.
32절에서는 내소로 들어가는 감람나무 문짝에도 그룹과 종려, 핀 꽃이 아로새겨지고 금으로 입혀졌다고 합니다.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매개이며, 무엇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지를 결정하는 접근 수단을 뜻합니다. 따라서 내소의 문에 그룹들이 새겨졌다는 것은,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접근 자체가 주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단지 지식을 많이 쌓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해서 내소가 표상하는 천적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열어 주시고, 사람의 사랑과 삶이 준비되었을 때에만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짝도 감람나무로 만들어지고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이는 가장 내적인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오직 사랑의 선을 통해서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으로 내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하여 들어갑니다. 신앙의 아르카나는 호기심이나 지적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선한 삶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이 문에 새겨졌다는 것은, 자기 사랑과 감각적 추론으로 들어가려는 길은 막히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을 통해 들어가는 길은 보호되고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AC.308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상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이 성전과 그룹들, 그리고 금과 감람나무, 종려와 꽃을 보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의 오심과 천국, 그리고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을 표상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이 내적 의미가 감추어진 것은 주님의 거룩한 것을 그들에게 주지 않으려는 처분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알고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안에서 거부, profane 하지 않도록 보호하신 섭리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표상 안에는 있었지만, 그 표상의 속뜻은 마치 내소의 문과 그룹들 뒤에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출25의 그룹들과 비교하면 의미의 발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출25에서는 작은 증거궤 위의 그룹들이 속죄소를 덮고 있었지만, 왕상6에서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가 성전 내소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는 같은 주님의 섭리가 성막에서 성전으로, 한 기물의 보호에서 성전 전체의 보호로 확대되어 표상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동일합니다. 증거궤와 내소가 모두 주님과 주님께 속한 가장 거룩한 천적인 것들을 뜻하므로, 그 위와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그룹들은 사람이 자신의 proprium으로 그 거룩한 것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합니다.
창3:24와의 연결도 분명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고, 솔로몬 성전의 그룹들은 내소와 그 문과 벽을 가득 채우며 지켰습니다. 생명나무와 내소는 모두 주님과 천적 생명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창3의 그룹들과 왕상6의 그룹들은 동일한 속뜻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을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profane, 영원히 파멸하지 않도록 지키셨습니다. 성전의 그룹들도 내소를 없애거나 비워 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존하면서 그 접근을 질서 있게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상6:23-29, 32가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주님의 가장 내적 거룩함을 보호할 뿐 아니라 성전의 내소와 외소, 벽과 문, 곧 교회와 사람의 모든 내적, 외적 단계에 걸쳐 주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와 금은 그 보호의 본질이 천적 사랑의 선임을 나타내고, 내소 전체를 채운 날개는 그 보호가 완전함을 나타내며, 벽과 문에 새겨진 그룹들은 거룩한 것에 이르는 모든 과정과 접근이 주님의 질서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인용의 중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그룹들은 사람이 신앙의 아르카나 안으로 자신의 proprium과 감각, 기억 지식을 가지고 광적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그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냉혹한 장벽이 아니라, 사랑의 선에서 나와 거룩한 것을 온전히 보존하고, 사람이 합당한 상태가 되었을 때,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지키시는 자비로운 보호입니다.
4. ‘출25의 그룹과 왕상6의 그룹’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왕상6:27)
위 구절 표현 말인데요, 저런 상태에서 어떻게 출25:20처럼 두 그룹이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향할 수 있나요?
이 구절을 처음 읽으면 누구나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왕상6:27은 거대한 두 그룹의 날개가 한쪽은 양쪽 벽에 닿고, 다른 한쪽은 성전 중앙에서 서로 맞닿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출25:20에서는 그룹들의 얼굴이 서로를 향하고 동시에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도 같은 자세였다면, 과연 저런 날개의 배치 속에서 서로 마주 보고 속죄소를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은 왕상6과 출25가 같은 그룹을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본문은 서로 다른 그룹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25의 그룹들은 모세 시대에 언약궤와 함께 제작된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속죄소 양쪽 끝에 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서로를 향하고 시선은 아래의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세는 출25:20이 직접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왕상6의 그룹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새로 만든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높이가 각각 십 규빗에 이르렀으며, 날개를 펼치면 내소의 벽에서 벽까지 닿을 만큼 컸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내소 안에 독립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형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출25의 작은 그룹들과는 용도와 위치가 서로 달랐습니다.
이 사실은 왕상8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제사장들은 광야 시대부터 내려오던 바로 그 언약궤를 내소로 옮겼습니다. 왕상8:6-7은 언약궤가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룹들은 왕상6에서 새로 만든 거대한 그룹들입니다. 즉 언약궤는 거대한 그룹들의 날개 아래 놓였지만, 언약궤 자체에는 이미 모세 시대부터 있던 속죄소와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의 내소에는 실제로 두 종류의 그룹이 함께 존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는 언약궤의 일부인 작은 금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얼굴은 서로를, 그리고 시선은 속죄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솔로몬이 새로 세운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입니다. 이들은 내소 전체를 덮는 상징적인 보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왕상6은 날개의 위치만 설명할 뿐, 얼굴의 방향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기록한 대하3:13은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제공합니다. 거기에는 ‘그룹들의 얼굴이 외소를 향하였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거대한 그룹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기보다 성소, 곧 외소를 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본문에 가장 충실합니다.
이렇게 보면 출25와 왕상6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출25의 작은 그룹들은 언약궤 위에서 서로 얼굴을 향하고,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왕상6의 거대한 그룹들은 내소 안에 서서 펼친 날개로 언약궤 전체를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소 위의 작은 그룹들과 내소를 덮는 큰 그룹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AC.308의 인용 의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들의 자세나 조형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라는 표상이 어디에 놓여 있든 동일하게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속죄소 위 작은 그룹은 가장 내적 거룩함을 직접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내고, 솔로몬 성전 거대한 그룹은 그 거룩함뿐 아니라 내소 전체를 감싸 보호하는 섭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출25와 왕상6은 서로 충돌하는 본문이 아니라, 동일한 영적 진리가 더욱 풍성하고 확대된 모습으로 표현된 본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출25:22가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소가 바로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룹들이 단순한 장식이나 수호 천사가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표상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AC.308은 그룹들의 본질적인 의미를 ‘주님께서 사람이 거룩한 것에 무질서하게 접근, 그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시는 신적 섭리’로 설명하는데, 이 구절은 그 섭리가 단순히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오히려 사람과 주님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증거궤 안에서’ 말씀하시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룹들에게’ 말씀하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죄소 위, 곧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룹들이 주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시는 그룹들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룹들이 지키고 있는 거룩한 중심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속죄소(the mercy seat)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속죄소는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신적 자비와 신적 인성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모든 신적 계시와 모든 진리는 심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자리를 그룹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그 자비가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주님의 섭리가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만일 그룹들이 사람을 무조건 내쫓거나 접근을 영원히 차단하는 존재라면, 주님의 음성도 그들 밖에서 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그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들의 기능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만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에서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308은 그 의미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룹들은 생명나무를 없애거나 접근을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proprium과 감각적 추론으로 생명의 거룩한 것을 profane 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출25:22는 바로 그 보호의 적극적인 목적을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이야말로 주님께서 사람과 만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주님의 섭리가 언제나 ‘보호를 위한 제한’이라는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람은 흔히 제한을 자유의 박탈로 생각하지만, 말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거룩한 것 안으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그룹은 길을 닫는 존재가 아니라, 길을 보존하여 지키는 존재입니다. 출25:22에서 주님의 음성이 그룹들 사이에서 들렸다는 것은, 보호와 계시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섭리 안에서 함께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유대교회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룹들을 볼 수 있었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정해진 질서와 의식을 따라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멀리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한 질서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질서 안에서 주어졌으며, 그 질서를 벗어난 접근은 거룩한 것을 profane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출25:22는 또한 왕상6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광야 시대의 언약궤와 속죄소, 그리고 그 위의 작은 금 그룹들이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위를 다시 거대한 감람나무 그룹들이 내소 전체를 덮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여전히 속죄소와 그룹들 사이에서 상징되었지만, 이제는 내소 전체가 거대한 그룹들의 보호 아래 놓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계시와 임재가 여전히 같은 중심에서 나오지만, 그 거룩함을 보호하시는 섭리가 더욱 풍성하고 완전하게 표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는 말씀은 AC.308의 핵심을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룩한 것 밖에 영원히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곳을 마련하시고, 그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룹들로 지키게 하십니다. 만일 거룩한 것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것을 받아 생명을 얻는 대신 오히려 profane, 더 큰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룹들의 보호는 계시를 막는 장벽이 아니라, 참된 계시가 계속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거룩함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결국 출25:22가 AC.308에 인용된 이유는, 그룹들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바로 그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사람이 장차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자비의 섭리임을 가장 아름답게 증언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6. ‘민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7:89)
민7:89를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출25:22에서 주신 약속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출25에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만나 말씀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민7에서는 그 약속이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을 때, 실제로 주님의 음성이 바로 그곳에서 들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룹이 단순한 장식이나 성막의 예술적 요소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와 계시가 질서 있게 이루어지는 거룩한 영역을 보호하는 표상임을 실제 사건을 통해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 위치가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은 단순히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음성은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들려왔습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언약궤 자체나 그룹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표상하는 속죄소와 그것을 보호하는 그룹들이 이루는 거룩한 질서 가운데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룹은 계시의 근원이 아니라 계시가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AC.308의 중심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룹의 의미를 ‘거룩한 것을 모독,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은 보호를 곧 접근 금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민7:89는 그 반대의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로 그룹들이 지키는 중심에서 들립니다. 이는 그룹의 역할이 사람을 주님에게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훼손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계시가 이루어지도록 보호하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창3:24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들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겉으로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AC.308은 그것이 영원한 차단이 아니라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라고 설명합니다. 민7:89는 그 보호의 참된 목적을 실제 사건으로 보여줍니다. 그룹들이 지키는 곳은 사람이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된 사람과 만나 말씀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룹은 생명의 길을 폐쇄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길이 거룩하게 보존되도록 지키는 존재입니다.
출25:22와 민7:89의 관계도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출25:22는 주님의 약속이고, 민7:89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는 앞으로 이루어질 질서를 선언하고, 다른 하나는 그 질서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스베덴보리가 AC.308에서 두 본문을 함께 인용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한 상징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가 실제 계시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참된 계시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그룹이 아니며, 속죄소도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그룹은 그 거룩한 임재와 계시가 사람의 proprium이나 감각적 추론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계시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시며, 그룹은 그 계시가 순수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주님께 말씀드리려 했을 때, 그는 자기 생각이나 추론 속에서 답을 얻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응답은 주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모든 참된 진리가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상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으로 거룩한 것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는 거룩한 질서 안에서만 참된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민7:89는 AC.308의 의미를 가장 실제적으로 입증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님의 신적 섭리는 사람을 거룩한 것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장벽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보존함으로써 사람이 올바른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안전하게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자비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두 그룹 사이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은, 그룹이 단순한 수호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사람과 교통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7. ‘겔9:3-7’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겔9:3-7)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Ezek. 9:3–7).
겔9:3-7을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장소를 장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의 가장 거룩한 것들을 보호하시며, 동시에 심판과 구원의 질서를 집행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표상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24에서는 그룹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성막과 성전에서는 언약궤와 속죄소를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겔9에서는 타락한 교회 가운데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함께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다양한 장면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이 본문을 AC.308에 함께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서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주님의 임재가 그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그룹이 주님의 영광을 대신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가 거룩하게 보존되고 나타나는 영역을 지키는 신적 섭리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과 함께 언급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임재가 언제나 섭리의 보호 아래 역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예루살렘 가운데를 다니며,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해 탄식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립니다. 그 후 다른 자들은 표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집행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겉으로 보면 무서운 심판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심판 이전에 먼저 보존이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먼저 보호받을 사람들이 구별되고, 그다음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룹이 표상하는 신적 섭리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은 먼저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그 후에 악을 분리하십니다.
이 원리는 창3:2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 역시 먼저 생명나무를 보호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영원히 내쫓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겔9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먼저 표를 받은 사람들이 보호되고, 그 후에 심판이 시행됩니다. 따라서 그룹은 단순히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서도 선한 것을 먼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나타냅니다.
특히 이마에 표를 받는 장면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이마는 말씀의 속뜻으로 사랑과 의지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마에 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외적 표시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랑과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섭리 가운데 보호받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처벌하는 데 먼저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보존하는 데 먼저 목적을 두십니다.
본문에서 성전까지 더럽혀지고 뜰이 시체로 가득 차는 모습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역사적인 학살 장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의 내적 거룩함이 완전히 황폐해졌음을 나타내는 표상입니다. 거룩한 것이 스스로 거룩함을 잃었을 때에는 그것이 더 이상 거룩한 것으로 남지 못하도록 분리하는 것 역시 신적 섭리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더 큰 profanation을 막기 위한 보호입니다. 이 점에서도 에덴동산의 그룹과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출25:22와 민7:89에서는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거기서는 보호와 계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겔9에서는 같은 그룹이 보호와 심판의 질서를 함께 나타냅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참된 계시를 보존하는 것도,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모두 동일한 신적 섭리의 서로 다른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08은 여러 본문을 나란히 인용, 그룹의 기능을 하나의 일관된 원리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 장면은 최후의 심판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의 심판은 선과 악을 뒤섞인 상태로 두지 않습니다. 먼저 선한 것을 보호하고 분리한 다음, 악한 것을 악한 것끼리 모이게 하십니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 모두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신적 섭리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보호의 질서를 대표합니다.
결국 겔9:3-7을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거룩한 장소를 지키는 존재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교회의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선한 사람들을 먼저 보존,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3의 에덴동산, 출애굽기의 성막, 솔로몬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은 모두 서로 다른 시대와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한결같이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사람을 모독으로부터 지키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섭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8. ‘겔10:2, 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겔10:2, 7)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Ezek. 10:2, 7).
겔10:2, 7을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거룩한 것을 지키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섭리가 심판과 정결의 역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앞의 겔9가 보호와 구별의 질서를 보여준다면, 겔10은 그 보호가 끝난 후, 교회의 황폐함에 대한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장면 역시 창3:24의 그룹과 동일한 영적 원리를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에 AC.308에서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은 그룹 아래, 바퀴 사이에 있는 불을 손에 가득 담아 예루살렘 위에 흩뿌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어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에서 그것을 가져다가 세마포 입은 사람의 손에 건네줍니다. 말씀의 겉뜻만 보면 이것은 심판을 위한 불 전달 장면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으로는 주님의 거룩한 것이 이미 스스로를 거부한 교회에 더 이상 그대로 머물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은 단순한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최종적으로 분리하는 신적 작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이 그룹들 사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심판 자체가 그룹의 본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마저도 주님의 신적 섭리 아래 질서 있게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앞선 출애굽기에서는 같은 그룹들 사이에서 주님의 말씀이 들렸고, 민수기에서는 같은 곳에서 모세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같은 거룩한 중심에서 심판을 위한 불이 나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성이 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교회의 상태가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한 신적 선과 신적 진리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이 점은 창3:24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에덴동산의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켰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배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profanation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주님의 섭리였습니다. 겔10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납니다. 거룩한 것이 끝까지 profanation 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이미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에서는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을 분리하심으로써 더 이상의 profanation을 막으십니다. 따라서 심판 역시 보호의 반대가 아니라 보호를 완성하는 신적 섭리의 한 작용입니다.
본문에서 그룹이 직접 손을 내밀어 불을 건네주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그룹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신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심판과 모든 분리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룹을 신적 섭리의 표상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불은 말씀의 속뜻에서 언제나 사랑과 연결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불은 본래 신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과 따뜻함이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흩뿌려지는 불은 주님의 사랑 자체가 변하여 진노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거부한 교회의 상태가 그 사랑을 심판으로 경험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 역시 신적 섭리의 질서입니다.
겔9와 겔10을 함께 살펴보면 AC.308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9장에서는 먼저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하여 보호하셨고, 10장에서는 그 보호가 이루어진 후 심판이 진행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보존이 먼저이고, 심판은 그다음입니다. 선한 것을 먼저 보호하신 후, 악을 분리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역사 방식입니다. 그룹은 바로 이 질서를 대표합니다.
겔10:2, 7을 AC.308에서 인용한 이유는, 그룹이 단순히 생명나무나 언약궤를 지키는 존재를 넘어, 주님의 거룩한 것이 profanation 되지 않도록 끝까지 보호하시며, 필요할 때에는 심판과 분리까지도 질서 있게 집행하시는 신적 섭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에스겔의 환상에 나타나는 그룹은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장면 속에 등장하지만, 말씀의 속뜻에서는 모두 거룩한 것을 보존하시고 profanation을 막으시며, 마지막에는 선과 악을 질서 있게 분리하시는 주님의 자비롭고 완전한 섭리를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AC.307, 창3:24,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7 여기서는 홍수로 멸망한 여섯째와 일곱째 후손에 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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