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0, 창3:24,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0
이 절에 나오는 각각의 표현에는 매우 깊은 아르카나가 너무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들은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본성(genius)에 관한 것인데, 그들의 본성은 홍수 이후를 살았던 사람들의 것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간략히 말하면, 태고 교회를 이루었던 그들의 첫 조상들은 천적 인간들이었으며, 따라서 천적 씨(seeds)가 그들 안에 심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들 안에도 천적 기원에서 나온 씨가 남아 있었습니다. 천적 기원의 씨란,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려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걸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의지와 이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 또는 선은 의지에 속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태고 사람들은 사랑 또는 선으로부터 신앙 또는 진리에 속한 것들을 직접 지각하였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계통의 후손들에게는 동일한 천적 기원의 씨가 반드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진리와 선에서 떨어지는(falling away)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철저히 왜곡, 사후에도 거의 회복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적 씨는 없고, 영적 씨만 가진 사람들은 이와 다릅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러하였고, 오늘날 사람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며, 따라서 선을 향한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할 수 있는 능력, 곧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진리에 관한 지식과 그로부터 생기는 선을 기초로 양심을 사람 안에 서서히 심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어느 정도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다만 그 길은 천적 인간과는 다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에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입니다.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어떤 삶이 흘러나오는지, 그리고 그 결과 사후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해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홍수 이후 사람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철저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언급한 뒤,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후대 사람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홍수 심판의 이유를 도덕적 차원보다 인간의 영적 구조라는 차원에서 밝히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천적 씨’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씨’는 단순한 재능이나 성향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심어 놓으신 영적 생명의 근원을 뜻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 그 씨는 천적 기원이었으므로, 사랑이 인간 존재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진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추론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된 ‘퍼셉션’의 본질입니다.
이 때문에 태고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지와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일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험합니다. 이해로는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가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아직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이러한 분열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이해를 이끌었고, 이해는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였습니다. 의지와 이해는 서로 다른 기능이면서도 하나의 생명처럼 작용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의 타락은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죄가 오늘날 사람들보다 더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들의 인간 구조 자체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위험했던 것은 일시적인 유혹이나 순간적인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사랑과 거짓이 반복적으로 받아들여져 마침내 의지 자체의 생명이 되어 버릴 때, 인간 존재 전체가 함께 변질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에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지만, 이해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 자체가 생명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중심이 근본적으로 뒤바뀌면 이해와 삶 전체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가 변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경우 ‘사후에도 거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지 자체가 완전히 부패,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일 기반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영적 씨’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진리를 직접 지각하지 못합니다. 대신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려는 과정 속에서 양심이 형성됩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는 사랑에서 진리로 나아갔다면, 홍수 이후의 교회는 진리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주님의 섭리가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여러 곳에서 설명하는 ‘영적 인간의 길’입니다.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양심을 주님께서 서서히 심어 주신다’는 부분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도덕성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진리 안에 선을 불어넣으심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은 퍼셉션 대신 양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허락되었던 직접적인 지각보다 낮은 단계의 생명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더 깊은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구원의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의 인간은 퍼셉션은 잃었지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의 길을 선물 받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당시 사람들은 물론 오늘날 사람들조차도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현대 신학은 인간을 죄인과 의인, 또는 신자와 불신자의 관점에서는 자주 설명하지만, 인간의 내적 구조가 천적인지 영적인지, 의지와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사후의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러한 구분은 인간론과 구원론 전체를 이해하는 기초입니다.
AC.310은 홍수 이전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글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어떤 길을 따라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본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고교회처럼 퍼셉션으로 직접 인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양심을 형성하시고, 그 양심을 통하여 조금씩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영적 인간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듭남은 순간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는 삶 속에서 주님의 섭리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긴 여정인 것입니다.
AC.309, 창3:24, ‘두루 도는 불 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09 ‘두루 도는 불 칼’(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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