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105, ‘예쁜 여성 포함, 여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
스베덴보리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에 대해 어땠나요? 제가 이런 좀 이상한(?)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좀 솔직하게 표현하면, 저를 비롯, 저희 집안 남자들은 열에 아홉, 여자에게 지나치게 친절한 경향이 있어서입니다. 특히 예쁜 여자 앞에서는 거의 이성이 마비가 될 정도인데요... 저는 이젠 나이 들어 그래도 좀 많이 덤덤하지만, 그래도 아이고...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제는 이런 영역에서도 좀 변화가 필요하지 싶어 여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질문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인간적이고, 또 스베덴보리가 깊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여자를 조심하라’거나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아름다움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지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으며, 특히 천국의 여성 천사들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여러 곳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중요한 사실을 덧붙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은 얼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선과 진리가 외면으로 흘러나온 결과가 아름다움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먼저 ‘예뻐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는 이 질서가 자주 뒤집힙니다. 사람은 얼굴에 먼저 끌리고, 그 후에 마음을 보려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외적인 것에 먼저 사로잡히는 자연인의 경향으로 설명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며, 내면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예쁜 여자 앞에서는 거의 이성이 마비될 정도’라는 경험도 스베덴보리 식으로 보면 매우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사람 안의 자연적 애정이 강하게 자극받는 순간입니다. 문제는 그 자극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입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는 여러 층의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층에는 감각적 매혹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과 귀가 즉각 반응하는 영역입니다. 그보다 높은 곳에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 있고, 그보다 더 높은 곳에는 영혼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첫 번째 반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차 더 높은 사랑의 질서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목사님께 오히려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어떤 성향을 타고났느냐보다 그것을 어떻게 질서 있게 다스리느냐를 훨씬 중요하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기질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욕이 강하며, 어떤 사람은 돈에 민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異性)의 아름다움에 매우 민감합니다. 이것 자체가 곧 그 사람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들어오느냐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은 자기 안에 그런 경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사님처럼 ‘우리 집안 남자들은 원래 이런 성향이 있다’, ‘나도 과거에는 그랬다’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악을 보는 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여러 번 말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결혼애(結婚愛) 사상을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그는 진정한 결혼애(conjugial love)는 상대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과 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체적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선과 진리는 영원히 더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부부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욱 젊고 아름다워진다고 설명합니다. 내면의 사랑이 계속 외면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의 사상을 적용한다면 몇 가지 태도가 도움이 됩니다.
첫째,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반응을 오래 붙잡고 상상 속에서 키우기 시작하면 애정이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가능한 한 ‘얼굴’보다 ‘영혼’을 보려고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셋째, 무엇보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그 사람의 소유물처럼 바라보면 집착이 생기지만, ‘주님의 선이 이 사람에게도 조금 비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시선의 방향이 사람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집니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할 때 비로소 천사들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나는 괜찮다’ 방심할 때 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제게는 오히려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어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된 지금’
이 문장에는 이미 하나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여성을 얻을까’가 관심이었다면, 지금은 ‘이런 마음을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둘 것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질문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젊은 시절에는 귀족 사회와 왕실을 드나들며 매우 세련된 사교 생활을 했고, 많은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저작을 읽어보면 여성을 더 이상 감각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랑과 지혜의 결합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 ‘결혼애’(Conjugial Love)에서는 여성을 단순한 매혹의 대상으로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동반자로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결국 스베덴보리라면 목사님께 이렇게 권했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름다움에서 멈추지도 마십시오. 얼굴을 넘어 영혼을 보고, 영혼을 넘어 주님을 보십시오. 그러면 같은 아름다움을 보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을 끌어내리는 유혹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