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12, 창3:24,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2
이 구절에서는 홍수 이전 사람들의 상태가 충분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곧 그들이 천적 선(celestial good)으로부터 ‘쫓겨나’(cast out), 다시 말해 그것과 분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었다’(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는 걸 보면 말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며, 그 이후 시대 사람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도는 칼의 불’(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라는 표현도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면, ‘두루 도는 불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고 하지 않고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이 연속된 말씀 속에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으며, 오직 주님께서 천사들에게만 밝혀 주시는 것들입니다.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으며, 그 가운데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해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3 마지막 절의 표현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단어의 선택뿐 아니라 어순과 전치사의 방향, 단수와 복수의 차이까지 모두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겉으로는 거의 같은 뜻처럼 보이는 표현이라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먼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원래 ‘동쪽’, 곧 주님의 사랑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상태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여전히 동쪽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의 상태가 표현됩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천적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므로, 같은 방향 표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두루 도는 불 칼’과 ‘불의 칼’ 차이도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수식하는 방식과 단어의 결합 순서마저 각각 다른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의 차이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누렸던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와 관계가 있으며, 후대 사람들에게는 같은 표현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각각의 차이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더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곧 말씀의 모든 ‘상태’(state)에는 ‘무한한 아르카나’(infinite arcana)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절을 읽으며 몇 가지 의미만 발견할 수 있지만, 천사들은 같은 말씀 안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영적 의미를 봅니다. 이는 천사들이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을 상태와 사랑의 변화로 보기 때문입니다.
AC.312는 말씀의 신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전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단순한 문체의 차이나 표현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들이 천사들에게는 각각 다른 영적 상태와 주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인간이 기록한 종교 문헌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가장 작은 표현 하나에도 주님의 무한한 지혜가 담겨 있으며, 그 깊이는 천사들조차 계속해서 배워 가는 대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한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선언은, 창3뿐 아니라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vs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혹시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에 대한 좀 더 깊은 해설을 들을 수 있을까요? AC.312에서는 살짝 건드리고만 있지만 말입니다.
AC.312에서 스베덴보리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라는 표현은 오직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두 표현이 단순히 공간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영적 생명이 진행되는 내적 순서를 서로 반대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동쪽’은 주님을,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특별히 천적 사랑과 천적 선을 뜻합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모든 생명과 사랑과 선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편 ‘에덴’은 사랑과 그 기쁨을, ‘동산’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뜻합니다. 따라서 ‘동쪽’과 ‘에덴동산’은 서로 떨어진 두 장소가 아니라, 사랑과 그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지혜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영적 질서가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먼저 의지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에 지혜와 퍼셉션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어떤 진리가 참된지를 먼저 배우고 논증한 다음 그것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곧바로 지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사랑이 근원이었고, 지혜는 그 사랑에서 자라나는 동산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래 질서는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곧 천적 선으로부터 지혜와 인텔리전스를 향하는 방향으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타락하였을 때에도 그들의 내적 구조 자체는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출발점인 의지가 완전히 부패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원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이 의지를 채우고, 그 사랑으로부터 이해와 퍼셉션이 나왔지만,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이 의지를 점령하였고, 그 악한 의지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이해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선으로부터 진리가 나와야 할 통로가 악으로부터 거짓이 나오는 통로로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적 선으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이면서도, 여전히 그 본래 질서와 관련하여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라는 말로 묘사됩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었고, 유전적으로 부패한 의지에서 곧바로 영적 생명이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은 먼저 이해를 통하여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알고 인정하며, 양심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즉 후대의 영적 인간은 동산으로 표상되는 이해와 인텔리전스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표상되는 사랑과 선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후대 사람들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방향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나왔으므로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였습니다. 홍수 이후 교회에서는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입니다. 전자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는 천적 질서입니다. 후자는 이해에서 새로운 의지로, 신앙에서 체어리티로, 진리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전치사의 방향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단어 하나의 차이에 두 종류의 인간과 두 시대의 교회가 가진 내적 구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라는 표현은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단순히 과거에 천적 선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명 전체가 본래 사랑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는 구조였으며, 바로 그 구조가 타락 후에는 자기 사랑으로부터 광기 어린 persuasion이 흘러나오는 구조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룹들을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통로가 보호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영원히 폐쇄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거룩한 것에 접근하여 모독(profanation)하는 것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단순히 진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천적 질서의 기억과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사랑과 거짓에 결합하는 일이었습니다.
AC.312의 이 짧은 문장은 결국 AC.311에서 설명한 홍수 전후 인간 구조의 차이를 문법적 방향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의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진리로’ 살았고,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은 ‘진리에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그래서 앞 시대에는 ‘동쪽에서 동산을 향하여’가 맞고, 후대에는 ‘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가 맞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전치사의 순서가 바뀐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류의 내적 구조와 구원의 질서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vs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AC.312에서 스베덴보리는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 사용된 표현이 ‘두루 도는 칼의 화염’(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이며, 같은 상태를 오늘날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두루 도는 화염의 칼’(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이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면 ‘flame’과 ‘sword’의 결합 순서가 뒤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어느 것이 근원이고, 어느 것이 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말씀에서 ‘화염’ 또는 ‘불’은 기본적으로 사랑과 그 정서를 뜻합니다. 선한 의미에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천적 사랑을, 반대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서 일어나는 악한 욕망을 뜻합니다. 한편 ‘칼’은 진리가 거짓과 싸우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이 진리를 파괴하는 것, 특별히 거짓된 추론과 persuasion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화염’은 타락한 의지 안의 악한 사랑과 욕망을, ‘칼’은 그 악한 의지에서 나온 거짓과 파괴적인 persuasion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래 상태에서는 의지 안의 천적 사랑으로부터 이해 안의 퍼셉션과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하자 같은 내적 질서가 전도(顚倒), 그러니까 거꾸로 뒤집혀, 악한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거짓된 사고와 persuasion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이 먼저이고, 거짓된 추론은 그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는 ‘칼의 화염’, 곧 칼에 속한 화염이라기보다 ‘칼을 낳고 움직이는 화염’, 즉 ‘화염의 칼’이 더 적합했습니다. 이 어순은 악한 의지가 근원이고, 거짓된 이해가 그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를 조금 풀어 말하면, 홍수 이전 사람들은 먼저 어떤 거짓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기 사랑과 악한 욕망 안에 있었고, 그 욕망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의 이해는 독립적으로 진리를 검토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의지가 원하는 것을 확증하는 역할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persuasion은 단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니라, 의지와 이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10-311에서 그들의 persuasion이 다른 사람들의 사고와 호흡까지 압도할 만큼 치명적이었다고 설명되는 이유입니다.
반면 홍수 이후의 사람들, 곧 스베덴보리가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거짓이 반드시 의지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이해 안에서 먼저 거짓을 배우거나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여 확증한 뒤, 마침내 의지로 사랑하고, 자기 삶의 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의 경우에는 ‘칼’, 곧 거짓된 사고와 추론이 앞에 놓이고, 그 거짓에서 ‘화염’, 곧 악한 애착과 욕망이 일어나는 방향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했다면 ‘칼의 화염’, 곧 화염에 속한 칼이라는 순서로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살핀 ‘동쪽에서 에덴동산을 향하여’와 ‘에덴동산에서 동쪽을 향하여’의 차이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홍수 이전 천적 인간의 본래 질서는 의지에서 이해로, 사랑에서 지혜로, 선에서 진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질서가 타락했을 때에는 악한 의지에서 거짓된 이해로, 욕망에서 persuasion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화염’이 먼저이고, ‘칼’이 뒤따릅니다. 반면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은 이해에서 의지로, 진리에서 선으로 거듭나는 구조를 가집니다. 이 질서가 악용될 경우에는 거짓된 이해에서 악한 의지로, 거짓의 확증에서 악한 사랑으로 진행될 수 있으므로 ‘칼’이 먼저이고 ‘화염’이 뒤따르게 됩니다.
‘두루 돈다’(turning itself)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칼이 이리저리 회전한다는 시각적 묘사만은 아닙니다.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이 서로를 계속 강화하며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서는 악한 욕망이 거짓을 낳고, 그 거짓이 다시 욕망을 확증하며, 더 강해진 욕망이 또 더 극단적인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의지와 이해가 서로를 쉬지 않고 강화하므로, 그들의 상태는 끊임없이 ‘두루 도는’ 화염과 칼로 묘사됩니다. 이는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악과 거짓이 서로 먹고 자라면서 전체 마음을 점령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의 중심 목적은 그들의 악을 묘사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놓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죄의 상징인 동시에 보호의 상징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악한 의지와 거짓된 persuasion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다시 천적 선과 퍼셉션에 접근한다면, 그들은 거룩한 것을 악과 결합, 모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더 깊은 파멸에 빠지지 않도록 천적 생명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 화염과 칼은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사람에게서 빼앗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의 악한 사랑과 거짓된 persuasion 때문에 그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루 도는 화염의 칼날’이라는 어순은 홍수 이전 사람들의 타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서는 악한 사랑과 욕망이 근원이었고, 거짓과 persuasion은 그 사랑이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반면 후대 사람들에게서는 거짓된 이해와 확증이 먼저 형성되고, 그것이 점차 의지와 사랑을 불붙게 할 수 있으므로 ‘두루 도는 칼의 화염’이라는 반대 어순이 더 적합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두 단어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지만, 말씀의 속뜻으로는 홍수 이전 인간과 홍수 이후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작용하는 순서 전체가 그 차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AC.312에서 이 세부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밝힌 만큼, 이 해설 역시 말씀 속 무한한 아르카나를 모두 밝힌 것이라기보다, AC.310-312와 앞뒤 문맥을 토대로 그 핵심 구조를 가능한 범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3. ‘tree of lives’ vs ‘tree of live’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홍수 이전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the tree of lives)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만일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수와 복수의 차이조차 영적 의미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나무’는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 곧 사랑과 신앙, 또는 그로부터 나오는 삶을 나타냅니다. 특별히 ‘생명나무’는 주님 자신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사랑의 생명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나무는 단순히 영원히 사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적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생명들의 나무’라는 복수 표현이 사용되었을까요? 여기서는 단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조심스럽게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의지와 이해가 하나였고, 사랑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았으며, 속 사람과 겉 사람도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생명은 하나의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생명이 서로 완전한 질서 가운데 결합된 충만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들’(lives)이라는 복수 표현은 이러한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의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도 천국의 생명은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무한한 생명의 다양한 작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하나의 생명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나의 생명 안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들’이라는 복수형은 단순히 숫자의 복수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과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러한 천적 충만성 가운데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해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양심을 형성하며, 점차 새로운 의지를 받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태고교회의 직접적인 퍼셉션과 같은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중심 생명, 곧 주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향하여 점차 인도되는 형태를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후대 사람들에게 적용하였다면 ‘생명들의 나무’보다 ‘생명나무’라는 단수 표현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AC.312에서 왜 복수와 단수가 달라지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차이들까지도 ‘모든 상태에는 무한한 아르카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의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의 해설은 AC 전체에서 반복되는 원리들을 바탕으로 가능한 이해를 제시한 것이지, AC.312가 직접 밝힌 해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AC.312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서는 단수와 복수조차도 우연히 선택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언어에서는 단순한 문체상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천사들의 언어에서는 단수와 복수 하나에도 서로 다른 영적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들의 나무’와 ‘생명나무’의 차이를 설명하기보다, 그 차이 자체가 말씀의 신성을 증거하는 하나의 표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세 번째 예가 앞의 두 예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쪽 ↔ 에덴’, ‘flame ↔ sword’는 방향이나 순서의 변화이지만, ‘lives ↔ life’는 ‘복수와 단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단어의 배열만이 아니라 ‘문법 자체(방향, 어순, 단, 복수)’까지도 영적 의미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AC.312는 결국 말씀의 신성이 문장 전체뿐 아니라 문법의 가장 작은 요소에까지 스며 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11, 창3:24,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24) AC.311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의 내세에서의 상태는 이와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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