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5, ‘찬성 125표, 반대 193표’, 20년 섬긴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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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울림을 주지만, 실제 목회 현실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몇 가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스물여덟 살의 인물이 곧바로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처음부터 모두에게 ‘목사님’으로 불리는 설정, 20년 동안 담임목회를 하고도 재신임 부결 직후 곧바로 생계를 위해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전개, 퇴직금이나 사례비 정산, 교회의 최소한의 생활 지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 등은 실제 한국 교회에서는 다소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또한 이야기는 한 인물의 내적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위해 현실의 복잡한 교회 제도와 절차를 상당 부분 단순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현실적 허점을 먼저 따지기보다, 이야기 전체가 무엇을 상징하도록 구성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 역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그 안에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하나의 실제 사건이라기보다, 한 목회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 과정을 보여 주는 비유적 서사로 읽는다면 훨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처음 목회의 모습입니다. 그는 작은 교회에서 시작하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고, 병든 사람을 위로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데 일주일을 쏟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교회의 규모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처음에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즉, 사랑이 먼저이고 일은 그 사랑의 열매였습니다. 사람은 이 상태에 있을 때 주님의 생명이 비교적 자유롭게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 중심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교회가 성장한다’는 감사였지만, 어느 순간 ‘내가 잘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도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고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proprium이 다시 머리를 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어도 자기 공로와 자기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이전보다 더 미묘한 자기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외적인 성공보다 더 위험한 이유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주님께서 즉시 그를 넘어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권사의 입을 통해, 장로의 입을 통해, 아내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십니다. ‘목사님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가 사람을 갑자기 꺾기보다, 먼저 양심을 일깨우는 작은 경고들을 여러 차례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신호를 처음에는 오해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바로 그 영적 질서를 잘 보여 줍니다.
재신임 투표 역시 단순한 교회 정치 사건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그것은 주님께서 한 사람의 겉 사람을 무너뜨리심으로 속 사람을 살리시는 과정처럼 읽힙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와 지위가 안전할 때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의지하던 것이 무너질 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말씀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이 목회자 역시 재신임 부결이라는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사랑의 질을 비로소 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 가운데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장면은 뜻밖에도 회사에 취직하는 부분이 아니라, 작은 교회의 맨 뒷자리에 아무 직분 없이 앉아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중심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성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이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직분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 없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1장을 읽다가 ‘내가 실패했다고 내가 너를 버렸느냐’는 음성을 들었다는 대목은,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매우 중요한 영적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사람이 스스로 떠날 뿐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성공보다 사랑을, 업적보다 의지를 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은 외적인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실패를 통해 더욱 순수한 사랑으로 정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 작은 교회에서의 목회는 이전과 전혀 다릅니다. 이제 그는 교회를 성장시키려 하기보다 사람을 사랑하려 합니다. 숫자를 자랑하지 않고, 심방에서 먼저 들으려 하며, 사례비를 줄이는 일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조금 줄어들지만, 그는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성공에서 내적인 평안으로 중심이 이동한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하면, 선행 자체보다 ‘선을 사랑하는 상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큰 교회가 나쁘고 작은 교회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참된 주제는 규모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입니다. 사람은 작은 교회에서도 자기애에 빠질 수 있고, 큰 교회에서도 끝까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을 통해 시험하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실패를 통해 정결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의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서 주님과 이웃에게로 실제로 옮겨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사용하셔서 사람의 사랑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참된 거듭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SY.6, ‘성경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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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4, ‘교회 계좌에서 4천만 원이 개인 계좌로 이체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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