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7, ‘수도실에 들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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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목사님의 이번 영상은 앞선 ‘오직 성경’ 영상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분의 수도 영성과 죽음 묵상을 보여 줍니다. 나무 위 작은 방, 해골 모형, 도토리, 순교자의 유품, 사형수의 용수, 성 프란시스의 오상과 관련된 돌, 관 속에서 자는 수행 등은 모두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킵니다. 곧 자신을 낮추고,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직 주님과 말씀을 붙들겠다는 결단입니다. 이러한 진지함과 자기 절제의 의지는 가볍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이 세상과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 자체는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수도적 상징과 외적 훈련은 그 자체가 영성의 본질은 아닙니다. 해골을 바라보고, 관 속에서 자고, 순교자의 유품을 곁에 두며, 죽음을 날마다 묵상하는 것은 마음을 일깨우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 행위가 실제로 사람 안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약화시키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외적인 경건에 머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수도는 장소나 도구에 있지 않고, 사람의 의지와 생각이 날마다 새롭게 되는 데 있습니다. 숲속의 작은 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안의 내적 방이며, 관 속에 들어가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고집과 악한 애정을 실제로 죽이는 일입니다.
영상에서 강 목사님은 ‘나도 언젠가는 해골이 될 것’이라고 하며 내려놓음과 비움의 훈련을 말합니다. 이 점은 자연적 차원에서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죽음을 단순히 육체가 해골이 되는 사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계로의 이행이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인격은 그대로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핵심은 ‘나는 곧 죽는다’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몸은 반드시 벗게 되지만, 자기 사랑과 탐욕과 교만은 육체와 함께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가장 깊이 사랑한 것은 사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점에서 스베덴보리라면 죽음 묵상을 자기 부정의 감정으로만 이끌지 않고, 현재의 사랑과 삶을 점검하는 방향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도토리를 하나씩 넘기며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반복 기도하는 전통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 기도는 마음을 모으고, 분산된 생각을 주님께 향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기도의 가치는 횟수나 형식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람의 내면이 주님께 열리는 일이며, 그 기도 뒤에 실제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가 뒤따를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기도가 됩니다. 입술로 백 번 자비를 구하면서도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악한 습관을 붙들고 있다면 그 반복은 영적 효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짧은 한마디의 기도라도 진실한 자기 성찰과 실제적인 순종으로 이어진다면 주님 앞에서 훨씬 더 깊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살점과 관련된 유품을 보며 ‘나도 순교해야지’라고 다짐하는 대목은 특히 조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교의 영성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이라는 점에서 숭고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으로 죽는 것보다 내적으로 자기 뜻을 버리는 것이 더 본질적입니다. 사람은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을 수는 있어도, 여전히 자신의 명예와 영적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순교를 겪지 않더라도 날마다 자기 교만과 복수심과 지배욕을 내려놓는 사람은 깊은 의미에서 순교의 길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다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때문에 오늘 내 악한 애정을 죽이겠다’는 결단입니다.
성 다미안의 도구를 보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일해야지’라고 다짐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각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책임 안에서 정직하고 유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천국의 질서 역시 수많은 유용한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을 섬기려는 마음은 참된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역시 ‘고난받는 성자처럼 보이고 싶다’는 자기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형수의 용수를 보며 ‘우리 모두는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사형수’라고 말하는 표현에는 복음의 빛보다 죽음의 압박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이 반드시 죽는 존재라는 사실은 맞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지상 생활은 단지 처형을 기다리는 감옥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장소이며, 사람이 자유롭게 선과 악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영적 성품을 형성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장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공포의 집행일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형성한 삶이 다음 세계에서 계속되는 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언젠가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조급함보다, ‘오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실제로 행해야 한다’는 평온하고 지속적인 책임이 더 중요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오상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단지 육체적 고통의 절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지옥의 세력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고통 자체를 숭배하거나 상처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못자국을 감정적으로 기념하는 것보다, 자신의 악한 애정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는 것이 십자가를 실제로 지는 일입니다.
영상의 중심에는 다시 ‘오직 성경’이라는 선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상에서도 앞선 영상과 같은 긴장이 나타납니다. 강 목사님은 초대교회 문서와 유대교의 구약 해석, 고대 문헌을 산더미처럼 구입해 분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실제 연구 방식은 ‘성경만’이라기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수많은 전통 문헌을 함께 연구하는 방식’입니다. 이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료들이 말씀의 참된 깊이를 열어 주는 최종 권위처럼 여겨질 때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깊이는 유대교 전승이나 초대교회 문헌의 오래됨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의 신성은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고, 그 내적 의미가 천국과 주님께 연결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책이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정확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책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오시고, 사람을 가르치시며, 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거룩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구원을 준다’기보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말씀을 많이 연구하고, 수천 권의 책을 쓰며, 수많은 강의를 한다 해도,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께 순종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 자체가 구원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800권을 만들었고 앞으로 2천 권을 만들겠다’는 목표는 놀라운 열정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는 분량이나 생산성보다 그 안에 어떤 영이 흐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책이 곧 많은 진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명예를 높이고 독자를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나도 놀라고 그들도 놀란다’는 표현에는 발견의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영적 지식이 사람에게 특별한 우월감이나 권위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가장 깊은 진리는 사람을 높이기보다 겸손하게 하며, 자신이 아는 것보다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모순은 외적으로는 끊임없이 비움과 죽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방대한 저술과 업적의 축적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해골과 관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800권과 2천 권의 목표는 자칫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교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외적인 비움의 상징보다 내적인 proprium의 움직임을 더 엄격히 살폈을 것입니다. 사람은 소유를 버리면서도 자기 의로움을 소유할 수 있고, 세상 명예를 버리면서도 영적 명예를 사랑할 수 있으며, 육체적 안락을 버리면서도 ‘나는 특별한 수행자’라는 자아를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수도 생활은 숲속에 들어가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수도의 본질은 사람 안에서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분별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과 싸우며, 일상의 관계와 책임 안에서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 위 작은 방에서 수도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수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숲속에서 오랜 시간을 기도해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분노와 지배욕을 이기지 못한다면 수도는 아직 외적입니다. 반대로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의 악을 살피고, 정직하게 책임을 다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은 깊은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강문호 목사님의 수행에는 분명 진지함과 열정, 죽음을 기억하려는 마음, 말씀에 전념하려는 결단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열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외적 상징과 훈련을 한 가지 기준 아래 두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실제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약화시키는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자라게 하는가 하는 기준입니다. 해골도, 도토리도, 순교자의 유품도, 관도, 숲속의 기도실도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성경 지식과 수많은 저술도 그 자체로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거절하며, 선과 진리의 삶으로 나아갈 때 참된 수도와 참된 ‘오직 성경’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외적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한 자아를 날마다 죽이는 것이며, 성경을 많이 연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SY.6, ‘성경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 아래 내용은 해당 유튜브를 먼저 보셔야 이해가 되니 참고하세요. 최근 충주봉쇄수도원의 강문호 목사님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의 핵심은 평생 성경을 연구해 온 자신의 여정을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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