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28, ‘이게 교회입니까, 카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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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아들과 뒤늦게 깨닫는 장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진리의 질서’가 ‘사랑의 질서’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이란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바라보는 중심 자체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진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실은 자신이 세워 놓은 질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원고의 강인호 장로는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성실하고 충성스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듯, 지옥은 악한 의도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선이라고 믿는 것 안에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랑이 섞여 있을 때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악인과 선인의 대결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신앙’과 ‘자신이 만든 신앙’을 구별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원고는 매우 의도적으로 ‘3040 세대가 조용히 사라진다’는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가장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점이 젊은 세대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로를 따라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왜 젊은 사람들이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 이야기는 ‘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를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자기 사랑 안에서만 세상을 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눈이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를 보아도 청년은 다른 교회를 보고, 장로는 또 다른 교회를 봅니다. 문제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느냐입니다.
강인호 장로는 처음부터 거의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새벽기도 20년 개근, 가장 먼저 교회 문을 열고, 보일러를 켜고, 헌금을 관리하고, 회의록을 검토하고, 누구보다 책임감 있게 봉사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다. 실제로 이런 분들이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인 선행 자체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선행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인지, 아니면 자신의 proprium이 만들어 낸 질서인지는 오직 시험이 올 때 드러납니다. 시험이 없을 때는 둘 다 거의 똑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드시 사람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시험이란 악인을 벌주는 시간이 아니라 선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는 시간입니다.
이 장로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원고는 이것을 단순한 습관처럼 묘사하지만, 상응적으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에서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편안한 자리에 머무르려 합니다. 장로는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과 찬송가를 올려놓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곳은 내 자리입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자기애는 대개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큰소리치지 않아도 자기 중심성은 충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예의 바른 자기애가 더 깊고 교묘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전통’입니다. 장로는 ‘전통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라면 즉시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전통인가?’ 전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전통을 보존한다면 이미 전통은 껍데기가 됩니다. 천국에서는 질서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 질서는 사랑을 위한 질서입니다. 사랑을 억누르는 질서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장로가 지키고 있던 것은 질서였지만, 주님이 세우시는 질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서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사의 청년부 개편안은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등장합니다. 영상 설교, 소그룹, 청년들의 참여, 질문 가능한 구조 등은 원고 안에서는 단순한 프로그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프로그램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들을 수 있는가’입니다. 천국에서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유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당회에서는 가장 먼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놀라운 것은 반대 이유가 악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proprium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자기애는 언제나 자신을 정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아들 도훈은 끝까지 아버지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틀린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진리는 사랑 없이 전달되면 닫히지만, 사랑 안에서 전달되면 스스로 사람의 양심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도훈은 아버지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가 시작됩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장로는 끝까지 방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아버지의 양심을 건드립니다. 사랑은 언제나 방어막을 통과합니다.
이야기의 전환점은 손자의 질문입니다. ‘아빠는 왜 교회 안 가요?’ 어린아이의 질문은 신학도 아니고 논쟁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린아이는 천국에서 오는 순수한 상태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아이의 질문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진실만 요구합니다. 그래서 장로는 처음으로 자신 안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시험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질문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아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예배당에서 다시 읽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원고는 매우 아름다운 상징을 사용합니다. 인쇄된 종이를 성경책 안에 끼워 두었다는 것입니다. 상응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 말씀 앞에 놓이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전까지 장로는 말씀으로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의 고통을 가지고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이 순서가 바뀌는 순간 거듭남은 시작됩니다.
‘카페입니까?’라고 말했던 자신의 음성이 되돌아오는 장면은 심판의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심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 심판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장로는 처음으로 자기 말을 자기 귀로 듣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드리는 기도는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주님, 제가 지킨 게 뭡니까? 교회입니까, 제 자리입니까?’ 이 질문은 사실 모든 종교인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스베덴보리는 모든 거듭남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선이라고 믿는 동안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주님이 실제로 역사하십니다.
이어 등장하는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은 단순한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다’는 이미지를 반복합니다. 장로는 교회를 세운다고 믿었습니다. 전통도 세우고, 질서도 세우고, 권위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자신이 세운 것은 구조였고, 주님이 세우시는 것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전환입니다.
이후의 변화는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장로는 갑자기 개혁가가 되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도 계속하고, 가장 먼저 교회 문도 엽니다. 달라진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먼저 말했고, 이제는 가장 마지막에 말합니다. 이전에는 빨간 펜으로 수정했고, 이제는 검은 볼펜으로 청년들의 말을 적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을 교회에 맞추려 했고, 이제는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외형은 거의 같지만 내면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장로가 결국 아들이 등록한 교회를 묻지 않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닙니다. 그는 이제 교회를 자기 소유로 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교회는 조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안에 있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면 됐다’라는 장로의 마지막 마음은 비로소 보편교회의 관점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보다 주님의 교회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원고를 읽으며,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곧 ‘청년들이 원하는 대로 교회를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원고가 말하려는 핵심도, 스베덴보리의 가르침도 그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에는 엄격한 질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질서 자체가 아니라, 그 질서가 사람을 살리는 질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청년들의 요구 역시 모두 옳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를 전달하는 사랑과 경청의 방식은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 원고가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전통을 버리라’도 아니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도 아닙니다. ‘먼저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들으셨고,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제목은 ‘교회를 떠난 아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난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떠난 것은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주님의 집을 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손자의 질문을 통해,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온 친구를 통해, 아들의 담담한 메시지를 통해 이미 집을 세우고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의 방식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기적보다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엮어 한 사람의 사랑의 질서를 바꾸십니다. 그래서 참된 거듭남은 언제나 밖에서 보면 아주 조용하지만,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히는 가장 큰 사건입니다.
SY.29, ‘삼위일체, 잘못돼서 어려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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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27,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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