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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4, ‘시흥영성수련원, 79차 심령부흥대사경회’

bygracetistory 2026. 8. 5. 19:00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모형에서 상응으로

긴 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만 듣고 글을 썼다면 아마 전혀 다른 내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강의라고 느꼈습니다.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이스라엘의 회복, 새 예루살렘 등 전체적인 틀은 오늘날 보수적 종말론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 그러니까 스베덴보리의 관점으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고 난 뒤에는 처음의 인상과는 조금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차이는 여전히 컸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먼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성경을 향한 진지한 태도였습니다. 이 강의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책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질서가 있으며, 성막과 광야와 가나안은 모두 장차 이루어질 더 큰 실체를 보여 주는 ‘모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의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의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으로 연결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충분히 귀하게 볼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스베덴보리를 떠올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을 문자 그대로의 역사로만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 안에는 하늘과 연결되는 내적 의미가 있으며, 눈에 보이는 역사 뒤에는 언제나 주님의 신적 질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출발점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경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을 읽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 교훈이나 역사책 정도로만 이해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처럼 말씀의 깊이를 찾으려는 태도 자체는 이미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한 두 사람의 길은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모형’이라는 열쇠를 사용하여 말씀을 풀이합니다. 성막은 하늘 성전의 모형이며,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고,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의 모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 이루어질 더 큰 실체를 미리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방향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상응(correspondence)이라는 열쇠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두 해석이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모형은 역사를 미래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상응은 역사를 인간의 영혼과 연결합니다. 성막은 천국의 모형일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도 상응하며, 광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의 상태와도 상응합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인 동시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영혼의 상태이며, 새 예루살렘은 장차 내려올 거룩한 성인 동시에 주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교회와 인간의 내면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이 차이를 이렇게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역사의 설계도’로 읽으셨고, 스베덴보리는 같은 성경을 ‘영혼의 설계도’로 읽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해석 방법 하나가 다른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달라집니다. 강사 목사님의 시선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향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 일을 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더 이상 과거를 설명하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책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내 안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옛사람을 벗기시고 새사람을 빚어 가시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책이 됩니다. 저는 이번 긴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바로 이 한 가지 차이가 이후 등장하는 휴거와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 일곱 교회, 이기는 자에 대한 모든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도 결국은 모두 이 한 가지 질문으로 다시 모일 것입니다. ‘말씀은 미래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우리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기록된 것인가?’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어 올수록 그 대답은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한 사람의 영혼을 천국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설계도와 영혼의 설계도

강의를 계속 들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표현 가운데 하나는 ‘모형적 진리는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말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출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여정을 단순한 민족사의 한 장면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미리 보여 주신 거대한 청사진이며, 동시에 성도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영적 모형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들으며 깊이 공감했습니다. 성경의 사건들은 결코 흩어진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여호수아서와 요한계시록은 서로 무관한 책들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질서 속에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이러한 통일성을 붙드는 태도는 오늘날 성경을 지나치게 조각내어 읽는 풍조 속에서 오히려 귀하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설계도가 단지 역사를 위한 설계도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설계도는 무엇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설계도입니다. 출애굽은 애굽이라는 한 나라를 떠난 사건인 동시에, 사람이 세상 중심의 삶에서 주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가는 첫걸음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을 걸었던 장소인 동시에, 인간이 거듭나는 동안 반드시 지나야 하는 시험과 훈련의 상태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목적지였지만,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은 영혼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강사 목사님은 하나님의 설계도를 주로 역사 속에서 찾으셨고,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계도를 인간의 내면에서 발견합니다.

 

이 차이는 성경을 읽는 독자의 위치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역사의 설계도를 따라 읽을 때, 우리는 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의 설계도를 따라 읽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나는 지금 광야 어디쯤에 있는가’, ‘내 안에는 아직 어떤 애굽이 남아 있는가’, ‘나는 정말 가나안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성경은 그때부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됩니다. 말씀은 더 이상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기록이 아니라, 오늘도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응은 역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더욱 살아 있게 만듭니다. 출애굽은 실제 역사였고, 광야도 실제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가 오늘 내 안에서도 반복될 때, 비로소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은 과거의 사건을 보존한 책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거듭남의 질서를 기록한 책입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표현이 스베덴보리의 상응론 안에서는 더욱 깊고 넓은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종말은 미래의 사건인가, 현재의 상태인가?

강의가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두 해석이 가장 선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강사 목사에게 요한계시록은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휴거와 대환난,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은 모두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들이며, 성도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세계 정세와 이스라엘의 회복, 전쟁과 재난, 국제 질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해석은 말씀을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읽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 역시 종말의 퍼즐 조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시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립니다. 물론 그는 최후의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실제로 인정합니다. 다만 그것을 먼저 외부 세계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인간의 내면에서 그 의미를 찾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세계의 마지막을 알려 주는 책이기 전에, 한 사람 안에서 옛사람이 끝나고 새사람이 시작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바벨론은 단순한 역사적 세력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권력욕이 지배하는 영적 상태이며, 아마겟돈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기보다 진리와 거짓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이는 마지막 싸움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장면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의지를 세우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문득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다룹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면, 종말 역시 우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무너지는 순간은 옛 시대의 종말이며, 주님의 사랑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순간은 새 시대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작은 종말’을 경험합니다. 어제까지 붙들고 있던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할 때, 미움을 내려놓고 용서를 선택할 때,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할 때마다, 한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해한 종말의 가장 깊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은 ‘언제 종말이 오는가’를 매우 진지하게 묻고 계셨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 내 안에서 무엇이 끝나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를 향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두 질문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미래의 재림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종말의 날짜를 정확히 계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 주님을 만나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의 예언서인 동시에, 오늘도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휴거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무엇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이다

강의를 들으며 가장 오랫동안 귀를 기울였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휴거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강사 목사은 휴거를 단순한 상징으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실제 사건이며, 이후 이어질 대환난과 천년왕국이라는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교리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복음주의 종말론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은 성도들이 휴거의 시기를 논쟁하기보다, 언제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단순히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강의가 아니라, 성도들을 영적으로 긴장하게 하려는 목회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이끕니다. 그는 ‘언제 휴거가 일어나는가’보다 ‘주님께서는 무엇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그의 사랑과 의지를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어느 장소로 옮기는 것이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새로운 사랑 안으로 옮기는 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가장 중요한 ‘들림’은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영적인 상승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던 사람이 이웃을 위하여 살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주님께 이끌려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휴거 역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미래 어느 날 일어날 한 사건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선택할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조금씩 더 높은 영적 상태로 이끌어 올리십니다. 거짓에서 진리로, 자기 사랑에서 이웃 사랑으로, 두려움에서 신뢰로 옮겨 가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영적 휴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모든 종말론적 표현을 단순히 상징으로 돌려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 언제나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되는 더 깊은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휴거의 시기와 순서를 모두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사랑과 미움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지식은 그 사람을 천국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종말론의 세부 구조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날마다 주님의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천국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더 중요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현재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강사 목사의 강의와 스베덴보리의 저작이 결국 하나의 질문 앞에서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준비되어 있는가?’ 강사 목사은 다가올 마지막 시대를 향하여 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 내 마음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질문이 서로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깊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오늘의 거듭남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고, 오늘 거듭남의 길을 걷는 사람은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두려움 없이 그분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 가시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휴거를 바라볼 때, 그 역사야말로 말씀 전체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깊은 구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어디에서 시작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단연 천년왕국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천년왕국을 단순한 상징이나 비유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 이후 실제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시대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과 요한계시록이 함께 증언하는 역사적 실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예루살렘, 그리고 이기는 자들의 통치가 모두 이 시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강사 목사님이 천년왕국 자체보다도, 하나님께서 결국 역사를 선으로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성도들에게 심어 주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혼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로 귀결된다는 믿음이야말로 이 강의 전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년왕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는 먼저 ‘천년’이라는 숫자보다 ‘왕국’이라는 상태에 주목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나라는 특정한 연대 속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시작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미래에만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다스리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광야와 가나안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강사 목사님에게 광야는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연단의 과정이며, 가나안은 마침내 들어가게 될 안식의 땅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광야는 오늘도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이고, 가나안은 그 과정 속에서 이미 맛보기 시작하는 천국의 평안입니다. 물론 사람은 완전한 천국을 아직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은 이미 천국의 첫 열매를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죽은 뒤 처음 만나는 낯선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설명은 성도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을 힘있게 선포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소망을 오늘의 삶으로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단순히 기다리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현실이 됩니다. 미래의 완성을 기다리면서도 오늘 주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천년왕국이 언제 시작되는가’를 설명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년왕국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시선이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완성될 주님의 나라를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도 그 나라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년왕국은 달력 위의 한 시대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하시는 거룩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나라가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조용히 세워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그 점이야말로 두 관점이 가장 아름답게 대화할 수 있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도시인가,상태인가?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오래 머물러 생각하게 된 부분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새 예루살렘을 매우 실제적인 존재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늘로부터 내려올 거룩한 도성이며,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거하는 일반적인 천국이 아니라, 특별히 ‘이기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영광스러운 중심 도성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완성하실 실제 나라의 중심이며, 성도들은 이 영광을 사모하며, 오늘의 삶 속에서 연단과 순종을 감당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성도들의 소망을 매우 구체적인 미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천국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실제 나라라는 믿음을 심어 주려는 목회적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다시 한 번 시선을 인간의 내면으로 돌립니다. 물론 그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 예루살렘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보다 먼저 사람 안에서 세워집니다. 주님의 진리가 이해를 새롭게 하고, 주님의 사랑이 의지를 새롭게 할 때,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단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가 인간의 마음속으로 내려오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차이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리가 장차 들어갈 나라’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 세우고 계시는 나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는 미래의 소망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거듭남을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고 난 뒤에는 새 예루살렘이 더 이상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진리를 사랑하려 애쓰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을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합니다. 순금으로 된 거리, 진주로 된 문,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기초석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러한 묘사를 장차 이루어질 실제 영광으로 이해하십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표현을 상응으로 풀이합니다. 금은 사랑을, 보석은 진리의 다양한 빛을, 진주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참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은 건축 재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도성의 찬란함은 결국 주님께서 그 백성 안에 이루신 거듭남의 찬란함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지금 내 안에 아직도 미움과 교만과 자기 사랑이 가득하다면, 설령 장차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성 앞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진정한 기쁨으로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천국은 장소보다 상태가 먼저입니다. 사랑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고, 진리를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나라를 천국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은 뒤에 우리를 천국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조금씩 천국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결국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시선이 서로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우리에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나라가 이미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두 시선이 하나로 만나는 지점이 바로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의 질서가 땅으로 내려오는 것, 그것이 곧 새 예루살렘이며, 그 땅은 세상이라는 공간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마다, 언젠가 들어갈 한 도시를 기다리기보다 오늘 내 마음이 그 거룩한 도성을 닮아 가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요한계시록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는 가장 현재적인 초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특별한 성도인가, 거듭나는 모든 사람인가?

이번 강의를 통하여 강사 목사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표현을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이기는 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 표현은 강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이기는 자를 단순히 예수를 믿는 사람과 동일하게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만이 이기는 자이며,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새 예루살렘과 천년왕국의 영광이 허락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매우 높은 영적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출발이 아니라 끝까지 완주해야 하는 여정이며, 그 여정 속에서 반드시 영적인 성숙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저 역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신앙을 지나치게 가볍게 이해하는 경향도 적지 않습니다. 한 번의 결단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거나, 삶의 변화 없이도 구원의 확신만을 붙드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강사 목사님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거듭 외치시는 것은 분명 귀한 경고입니다. 신앙은 실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말씀은 반드시 인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은 누구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조금 더 조용하고도 깊게 바라봅니다. 그는 먼저 ‘무엇을 이기는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사람이 이겨야 하는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기 사랑과 거짓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전쟁은 먼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집니다. 아마겟돈도, 짐승과의 싸움도, 용과의 싸움도 결국은 주님의 진리와 인간의 자기 사랑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는 자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자기 자신을 이겨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이 설명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려 애쓰는 사람, 자기 교만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낮아지는 사람, 작은 선이라도 기쁨으로 실천하려는 사람이 모두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한순간의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생 계속되는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주님께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강의 후반부로 갈수록 강사 목사님의 설명도 이 점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거창한 영웅담보다 오히려 일상의 작은 순종을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려 애쓰는 것, 가정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 이런 작은 승리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성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며 두 관점이 가장 아름답게 만나는 지점을 보았습니다. 결국 이기는 자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자기 자신보다 조금 더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이기는 자’라는 표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주어진 칭호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거듭남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광야도 있고 시험도 있으며 넘어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 주님을 향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가 쌓이고 또 쌓일 때, 어느 날 우리는 비로소 이기는 자라는 말씀이 먼 미래의 영광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주님의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사람을 바꾸시는 주님의 학교이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께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신 또 하나의 주제는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뒤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십 년 동안 광야를 지나야 했던 이유를, 강사 목사님은 단순한 역사적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시는 영적 학교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하여 사람의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시고, 순종을 배우게 하시며,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에게 광야는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사랑의 교육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약속의 땅에 합당한 존재로 빚어 가시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스베덴보리 역시 깊이 공감합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시험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사랑의 과정입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자기 사랑에 붙들려 있는지, 얼마나 세상의 인정에 기대어 살아가는지,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지를 시험이 찾아오기 전에는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광야가 시작되면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 주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모르셔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시험이 필요하다는 설명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강사 목사님은 광야를 지나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이렇게 덧붙일 것 같습니다. ‘광야의 가장 큰 목적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장소 이전에 상태입니다. 만일 사람 안에 여전히 애굽의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설령 가나안에 들어간다 해도 그는 그곳을 천국으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사랑이 바뀌고, 기쁨이 바뀌고, 삶의 목적이 바뀌어야 비로소 천국은 그 사람의 집이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뒤에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천국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광야도 더 이상 단순한 통과 의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국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용서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진리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무엇보다 주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천국의 반대편이 아니라, 천국으로 이어지는 첫 교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광야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광야가 빨리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광야가 끝나는 것보다 광야가 이루는 일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광야가 끝났는데 사람은 그대로라면, 그는 또 다른 광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광야가 아직 계속되고 있어도 사람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가나안의 첫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고난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강사 목사님과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한 가지 사실 앞에서는 함께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변화이며, 광야는 그 변화를 이루시는 주님의 가장 깊은 사랑의 섭리입니다. 다만 강사 목사님은 그 광야를 장차 들어갈 가나안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바라보시고, 스베덴보리는 그 광야 자체가 이미 천국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바라봅니다. 저는 이 두 시선을 함께 붙들 때, 광야는 더 이상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시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미래를 예언하는 책인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책인가?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제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많은 모형을 말씀 속에 남겨 두셨을까?’ 강사 목사님은 그 대답을 매우 일관되게 제시하셨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가나안과 예루살렘은 모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여 주는 설계도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역시 그 설계도의 완성으로 읽어야 하며, 성도는 이 큰 흐름을 이해할 때, 비로소 마지막 시대를 바르게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강사 목사님이 무엇보다 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된다는 큰 그림은 분명 성경을 더욱 입체적으로 읽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 앞에서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질서를 창세기에서도, 출애굽기에서도, 여호수아에서도, 복음서에서도, 요한계시록에서도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단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영원한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시대는 바뀌고 역사도 흘러가지만,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같습니다. 애굽을 떠나고,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 질서는 아브라함 시대에도, 사도 시대에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책도 아니고, 미래 세대만을 위한 예언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거듭남의 교과서입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놀라운 힘을 느낍니다. 상응은 성경을 현재형으로 바꾸어 줍니다. 출애굽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광야도 지금 계속되고 있으며, 가나안도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까?’가 아니라 ‘이 말씀은 오늘 내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하면 요한계시록도 더 이상 두려운 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을 알려 주는 암호가 아니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 주는 희망의 책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끊임없이 ‘준비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준비는 시대를 분별하고, 순수한 진리를 붙들며,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일 것입니다. ‘말씀을 살아내십시오.’ 왜냐하면 말씀은 준비를 위한 정보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안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평생 강조한 진리와 사랑의 결합이며, 동시에 제가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가장 깊이 공감하게 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요한계시록을 예전보다 조금 다르게 읽게 되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 역사보다 먼저 귀한 것은 오늘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새롭게 하시기 전에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기 전에 한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십니다. 결국 성경의 모든 모형은 이 한 가지를 향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천국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저는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얻게 된 가장 소중한 깨달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왜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가?

이번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저는 처음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왜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결론에 이를까?’ 처음에는 그 이유를 휴거나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과 같은 개별 교리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강의를 모두 듣고 난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차이는 개별 교리에 있기보다, 성경을 읽는 가장 근본적인 방향에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한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말씀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지금까지 강의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휴거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보다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가의 문제가 되었고, 천년왕국은 언제 시작되는가보다 주님의 통치가 내 삶에서 시작되었는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장차 내려올 거룩한 도성인 동시에, 오늘 내 안에 세워지고 있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일곱 교회 역시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이기 전에,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여러 영적 상태를 비추는 거울처럼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상응이라는 열쇠가 말씀을 여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이번 강의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사 목사님의 해석을 가볍게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성경을 붙들고 씨름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강사 목사님의 관심은 결국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라는 말씀도, 광야의 연단을 통과하라는 말씀도, 이기는 자가 되라는 권면도 모두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더욱 정결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점에서 이 강의를 끝까지 들을 가치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목회적 열정을 조금 더 깊은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성도를 미래의 천년왕국으로 먼저 보내지 않습니다. 먼저 오늘의 거듭남으로 인도합니다. 먼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기 전에, 지금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그것은 종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오늘의 삶으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을 오래 접할수록 성경은 점점 미래의 예언서라기보다 현재의 생명서가 됩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실 것인가보다, 먼저 나를 어떻게 바꾸고 계시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이것이 이번 강의를 통하여 제가 얻은 가장 큰 열매일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저에게 다시 한 번 성경의 큰 그림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큰 그림이 결국 한 사람의 작은 마음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이 두 시선을 함께 붙들 때, 말씀은 더욱 풍성해진다고 믿습니다. 역사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이루시는 동일한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새 창조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이번 긴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깊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제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이 강의를 읽으며 독자들과 가장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문자는 문이요, 생명은 그 안에 계신 주님이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제 마음속에 여러 차례 떠오른 생각 가운데 하나는 강사 목사님께서 성경의 문자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시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작은 사건 하나도 결코 우연으로 보지 않으셨고, 출애굽과 광야, 성막과 절기, 가나안과 예루살렘,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하시려는 모습에서는 오랜 세월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 온 분만이 가질 수 있는 경건한 집념이 느껴졌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단순한 역사 자료나 종교 문헌 정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귀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무엇보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었기에 긴 세월 동안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묵상하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다시 스베덴보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역시 누구보다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말씀을 연구하며 살아갔고, 자신의 거의 모든 저작을 성경의 내적 의미를 밝히는 일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경 사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말씀의 문자를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그 문자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은 단순히 바른 해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접촉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은 단순한 해석학을 넘어 하나의 영적 경험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를 종종 집의 문에 비유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튼튼한 문이라도 그 문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이 없다면 집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말씀의 문자도 이와 같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역사도, 출애굽의 사건도, 광야의 시험도, 요한계시록의 환상도 모두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입구입니다. 그래서 문자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문 앞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문을 지나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문자를 통하여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거듭남의 생명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말씀은 살아 있는 계시가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강사 목사님께서 성경의 문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느꼈고,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 목사님의 ‘모형’과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서로 흥미로운 관계를 맺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막을 보며 장차 이루어질 하늘의 실체를 바라보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성막을 보며 인간의 마음과 천국 공동체를 함께 바라봅니다. 강사 목사님은 광야를 보며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광야를 보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여정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문자에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문자 너머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강사 목사님의 시선은 주로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에 머물고, 스베덴보리의 시선은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까지 더 깊이 들어갑니다. 저는 이 차이를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시선의 깊이와 방향의 차이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비유를 남깁니다. 그는 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합니다. 몸이 있어야 영혼이 이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듯이, 말씀의 문자도 있어야 그 안에 담긴 신적 생명이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문자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안에 신적 생명이 머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있고 생명이 없다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듯, 문자만 있고 그 안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말씀도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저는 이 설명을 처음 접했을 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은 단순히 연구해야 할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거룩한 자리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는 자연스럽게 제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말씀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 말씀이 얼마나 나를 바꾸고 있는가를 묻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말씀을 많이 기억하는 것보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성경을 수없이 읽었어도 여전히 미움을 붙들고 있다면,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아도 말씀 한 구절 때문에 용서하게 되고, 낮아지게 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면 그는 이미 문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말씀의 목적은 정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 목사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신 삶의 변화와도 아름답게 만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긴 강의를 마치며 강사 목사님에게서 말씀을 향한 깊은 경외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에게서는 그 말씀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둘이 서로 경쟁하는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람은 더욱 깊은 의미를 찾게 되고, 그 깊은 의미를 만날수록 다시 문자를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결국 말씀의 문자는 우리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문을 지나 주님을 만나는 순간, 성경은 더 이상 읽는 책에 머물지 않고 살아가는 생명이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바라보며, 바로 이 점이 스베덴보리의 성경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끝까지 상응을 말했는가?

이번 강의를 마무리해 가면서 저는 처음에 품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그렇게까지 ‘상응’을 반복하여 설명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사람들은 상응을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을 오래 읽다 보면 그것이 단순한 해석 기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상응은 성경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국과 세상, 영과 육, 사랑과 진리, 자연과 영계를 연결하시는 창조의 질서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해석법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였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강사 목사님은 성경의 여러 사건들을 ‘모형’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일관되게 설명하셨습니다. 성막은 하늘의 모형이고, 절기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의 모형이며, 광야는 연단의 모형이고, 가나안은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입니다. 저는 이러한 설명을 들으며 성경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스스로도 많은 사건을 ‘장차 올 것의 그림자’ 또는 ‘예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모형이라는 관점은 성경 안에서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번 강의의 중요한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묻습니다. ‘왜 그것이 모형이 될 수 있는가?’ 성막이 왜 하늘의 모형이 되고, 광야가 왜 거듭남의 여정을 드러내며, 가나안이 왜 천국을 상징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이 바로 ‘상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은 자연계의 따뜻함과 상응하고, 진리는 빛과 상응하며, 사람의 몸은 영혼과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 역시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질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모형은 상응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두 관점의 차이를 하나의 그림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성경의 ‘가로축’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가 출애굽과 광야를 지나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거대한 역사 말입니다. 그 흐름은 분명 아름답고,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축을 더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로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창세기에서 오늘의 나에게로, 광야에서 오늘의 시험으로, 새 예루살렘에서 오늘 내 안에 세워지는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축입니다. 가로축이 시간을 따라 흐른다면, 세로축은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 두 축이 만나는 자리에서 성경은 비로소 살아 있는 말씀이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끝까지 상응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일 것입니다. 만일 상응이 없다면 성경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책은 될 수 있어도,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책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상응만 말하고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상징의 세계로 흩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함께 붙듭니다. 그는 역사가 실제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역사가 동시에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역사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과거의 사건인 동시에 오늘도 계속되는 사건이며, 광야는 이스라엘의 여정인 동시에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저는 이 점이야말로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이 가진 가장 놀라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강의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며 저는 한 가지를 더욱 분명하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모형은 역사의 방향을 밝혀 주고, 상응은 영혼의 방향을 밝혀 줍니다. 저는 이 둘을 함께 바라볼 때 성경은 더욱 입체적으로 읽히며,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오래전의 기록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예언도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평생토록 ‘상응’을 말한 이유는 새로운 해석법을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의 생명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만일 스베덴보리가 이 강의를 끝까지 들었다면

이번 긴 강의를 모두 마친 뒤에도 한동안 쉽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조금 색다른 상상이었습니다. ‘만일 스베덴보리가 이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들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물론 누구도 그 대답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저작들을 오랫동안 읽어 온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떤 방향으로 생각했을지는 조심스럽게 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글은 비평도 아니고 평가도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의 독자로서, 또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그려 보는 하나의 상상입니다.

 

아마 스베덴보리는 강의를 들으며 여러 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의 통일된 계시로 읽으려는 태도 앞에서, 말씀을 존중하는 마음 앞에서, 그리고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권면 앞에서는 깊이 공감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저작을 읽어 보면, 참된 신앙은 언제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대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대로 천국에 간다는 그의 설명은 교리보다 삶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순종과 거룩함, 회개와 삶의 변화를 거듭 강조하신 부분은 스베덴보리 역시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몇몇 중요한 지점에서는 매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휴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님께서는 사람의 몸보다 먼저 사랑을 들어 올리십니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천년왕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주님의 나라는 먼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됩니다’라고 덧붙였을지도 모릅니다.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거룩한 성은 장차 내려오는 동시에, 오늘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안에 세워지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강의를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말씀을 한 단계 더 깊은 곳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조용한 권면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진리 안으로 이끄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상대를 이기려는 날카로움보다,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려는 따뜻함이 더 많이 배어 있습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말하는 목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큰 빛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리의 차이는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말하면서도 진리의 열매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의를 통하여 저는 또 하나의 귀한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전하신 말씀에는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이크 앞에서 하시는 말씀과 삶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진지함입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신앙인이 오래도록 간직해야 할 가장 귀한 모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을 거듭남의 중요한 열매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가 되고,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진리는 그의 삶 속에서 몸을 입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번 강의를 들으며 단지 하나의 종말론을 접한 것이 아니라, 한 신앙인의 삶의 태도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긴 글을 마무리하며 저는 처음보다 훨씬 더 조용한 마음으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모든 해석과 논쟁을 뒤로한 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붙들었던 많은 교리들이 더 밝은 빛 가운데 새롭게 이해될 것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말하지만, 그날에는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날을 생각하면, 교리의 차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 차이를 말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긴 시리즈의 마지막을 저는 하나의 소망으로 맺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를 바라볼 것입니다. 때로는 공감할 것이고, 때로는 분명한 차이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글의 목적은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논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며,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천국을 닮아 가도록 서로를 돕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든 참된 계시는 사람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 강의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교리의 차이는 남아 있지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말씀을 향한 경외심은 언젠가 모든 참된 신앙인이 함께 만나게 될 하나의 공통된 언어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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