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스베덴보리의 렌즈

SY.41, 신천지, ‘아밋대의 아들 요나’

bygracetistory 2026. 8. 6. 17:27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번 설교는 요나서 전체를 한 편으로 훑어가며,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성경 본문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악인이라도 멸망보다 회개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러한 방향 자체는 요나서가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며,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는 먼저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는 장면을 설명합니다. 니느웨는 악이 가득한 성읍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맡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설명합니다. 모세 역시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양했던 사실을 함께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인간적으로는 두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상당 부분 공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요나는 단순히 한 사람의 선지자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인간 마음의 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사람을 언제나 선을 향하도록 부르시지만, 사람 안에 있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은 그 부르심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합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진리의 책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마음의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니느웨가 악한 성읍이므로 요나가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성경의 도시와 나라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인간 정신 안의 상태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니느웨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왜곡되고 폭력적인 삶의 상태를, 요나는 그 상태를 향해 들어가야 하는 진리를 각각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도 우리 안의 ‘니느웨’를 외면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설교가 반복해서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귀한 강조입니다. 하나님을 심판만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보다, 끝까지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나서 전체도 하나님의 긍휼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 가지 중요한 보완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라기보다, 인간이 변화함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달라졌음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시므로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며, 인간이 악에서 돌아설 때, 비로소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비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말씀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 설교는 폭풍을 만난 배의 이야기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합니다. 요나 때문에 폭풍이 일어나고, 결국 제비를 뽑아 요나가 원인임이 드러나는 과정, 그리고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 역시 문자적인 교훈으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바다는 흔히 자연적인 사람의 마음과 수많은 거짓 생각이 요동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질서를 거스르면, 인간의 내면 역시 폭풍우처럼 흔들리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하면, 외적인 환경은 당장 변하지 않더라도 마음속 혼란은 점차 잔잔해집니다. 그래서 요나의 이야기는 오래전 한 선지자의 모험담이 아니라, 거듭남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반복되는 영적 여정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설교는 요나서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며, 하나님의 긍휼을 전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사건의 역사성과 도덕적 교훈에 머무는 부분이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요나의 도망, 폭풍, 바다, 큰 물고기, 니느웨는 모두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상응으로 읽힙니다. 바로 그때 요나서는 과거의 기록을 넘어,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새롭게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장면은 요나서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요나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 기도하고 감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을 연결하여,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건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져 온 해석이며, 신약성경 자체가 요나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 있는 연결입니다.

 

특히 설교자는 요나가 ‘주께서 나를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셨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더라도 기도와 감사를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신다는 교훈으로 연결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적용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단순히 불행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도록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장면을 바라보면, 물고기 뱃속은 단순히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매우 깊은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는 마치 자신의 거짓과 욕망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밖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는 빛을 거의 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큰 물고기는 그러한 상태를 보존하면서도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요나를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폭풍도, 바다도, 물고기도 모두 결국은 요나를 살리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를 언제나 구원의 방향으로 이해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판처럼 보이는 일도, 실제로는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생명으로 이끄는 수단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켜진 사건은 징벌이라기보다 회복을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말씀 전체의 정신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설교에서는 부모가 잘못한 자녀를 매로 징계하는 비유를 사용하면서, 자녀가 눈물로 회개하면 부모가 용서하듯 하나님도 요나를 용서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비유 역시 이해하기 쉽고 따뜻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감정이 오르내리며 화를 냈다가 마음을 푸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 편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될 때 비로소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후 니느웨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지만, 물고기 뱃속이라는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신뢰하는 동안에는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만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새로운 영적 생명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육지로 나오는 장면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이어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소개하며, 요나의 사흘이 예수님의 사흘을 예표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한 연결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도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미래의 천국을 보장하는 사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옛 자아를 벗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가장 완전한 모형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는 모습도 단순한 역사적 기적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거듭남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상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요나의 기도는 단순히 ‘어려울 때 기도합시다’라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자만과 자기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비로소 주님께 마음을 여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명이 다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의 명령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요나 역시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다시 니느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번 설교는 이 부분을 비교적 충실하게 설명하면서도, 중심을 ‘감사와 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귀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자체의 변화였습니다. 주님은 먼저 상황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할 때, 그 사람 앞에 놓인 사명도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서 2장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요나서 3장은 책 전체의 전환점입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로 요나를 부르시고, 이번에는 요나가 순종하여 니느웨로 들어갑니다. 그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고,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은 그 말씀을 믿고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합니다. 심지어 왕까지 자리에서 내려와 회개를 선포하고,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금식을 명합니다. 설교자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기뻐하시며, 심판보다 구원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힘 있게 전합니다.

 

이 부분은 설교 전체에서도 가장 따뜻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심판자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돌이켜 살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개가 단순히 눈물 흘리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충분히 귀한 적용입니다. 실제로 요나서 역시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켰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말합니다. 따라서 설교의 이러한 중심은 본문과도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에서 또 하나의 깊은 층이 열립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니느웨는 단순히 고대 앗수르의 수도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외적 삶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살아가는 생활과 내적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세계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내적인 믿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삶까지 함께 변화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느웨 전체가 회개하는 모습은 인간의 생활 전반이 말씀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은 모습을 소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왕의 겸손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왕은 인간 안에서 다스리는 원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왕이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진리가 삶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변화입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설교가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을 그대로 설명하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 본문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겉모습의 언어’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므로 처음에는 심판하려다가 나중에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인간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에서 떠났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는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감정에 따라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처럼 변덕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는 주님은 태양처럼 항상 같은 사랑과 같은 진리를 발하십니다. 햇빛은 변하지 않지만, 블라인드를 내리면 방이 어두워지고, 올리면 밝아집니다. 변화된 것은 태양이 아니라 블라인드, 한편으로는 창문입니다. 니느웨의 회개 역시 바로 이러한 원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또한 하나님께서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것 역시 성경 전체와도 조화를 이루는 매우 귀한 메시지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지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시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선택한 결과 도달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시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그 자유를 억지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합니다.

 

여기에서 신천지의 해석 방식과 스베덴보리의 접근은 미묘하게 갈라집니다. 이번 설교는 주로 ‘회개해야 구원받는다’는 교훈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회개를 단순한 결심이나 행동 수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악을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니느웨의 회개는 단순히 한 도시가 살아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영적 사건입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의 악을 인정하며, 삶을 바꾸고, 주님의 질서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니느웨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서 3장은 단순히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는 인간의 외적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으로 다시 배열되는 장면이며, 거듭남이 실제 생활 속에서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니느웨는 오래전 사라진 도시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변화되어야 할 삶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도 그 니느웨를 향해 말씀을 보내고 계십니다.

 

 

요나서 4장은 매우 독특한 장입니다. 대부분의 예언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나지만, 요나서는 오히려 선지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번 설교 역시 이 부분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지만, 정작 요나는 그것을 기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시자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요나의 모습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박넝쿨 사건을 통해 요나를 교육하시는 과정이라고 해설합니다.

 

이 부분은 설교의 적용도 비교적 분명합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의 회개를 기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기뻐하시며 용서하시는 분이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충분히 울림을 줄 수 있는 권면입니다. 용서는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덕목 가운데 하나이며, 요나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요나서의 절정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앞의 세 장이 니느웨의 이야기였다면, 네 번째 장은 사실상 요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보면, 니느웨보다 더 변화되어야 했던 사람은 오히려 요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직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행동은 바뀌었지만 사랑은 아직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겉으로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도 전하고, 봉사도 하고,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는 다른, 그런 사람의 구원을 달갑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속 사람의 변화가 거듭남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요나서가 마지막 장에서 요나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다음 날에는 벌레를 준비하시고, 이어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교육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해석입니다. 이것 역시 본문의 흐름과 잘 맞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관점에서는 박넝쿨, 벌레, 동풍 모두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박넝쿨은 하루아침에 자라 요나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느끼는 일시적인 위안이나 만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매우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자연적인 위안입니다. 그래서 벌레 하나가 그것을 갉아먹자 곧 시들어 버립니다. 인간이 자기 위안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면, 그것은 아주 작은 시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벌레 역시 흥미로운 상징입니다. 말씀에서는 벌레가 종종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거짓이나 왜곡된 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는 이미 생명이 약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박넝쿨이 밖에서 잘려 나간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들어 간 것처럼, 사람도 외적인 환경보다 내적인 사랑이 무너지면 결국 영적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이어지는 동풍은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대체로 주님과 사랑의 근원을 상징하지만, 뜨거운 동풍은 그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상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동일한 태양빛도 건강한 눈에는 빛이 되지만 병든 눈에는 고통이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요나가 견디지 못했던 것은 태양 자체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 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적용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하시는 질문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설교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 결론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구분하는 ‘내 편’, ‘네 편’을 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마지막 질문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넘어섭니다. 주님은 요나를 꾸짖기보다 질문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주님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강제로 사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으며, 자유 안에서만 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나서의 마지막은 미완성처럼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질문을 남기며 끝납니다. ‘너는 누굴 더 닮고 있는가?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회개한 니느웨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나인가?’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질문을 더 보탭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까지 닮아 가고 있는 사람인가?’ 이 마지막 질문이야말로 요나서 전체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깊은 영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설교는 요나서 전체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전하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멸망보다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권면은 요나서의 핵심과도 잘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요나의 표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결한 부분 역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해석으로서 무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만 놓고 보면, 이번 설교는 비교적 정통적인 기독교 설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천지의 많은 설교는 처음에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 의미와 일반적인 교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사람은 특별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신천지와 스베덴보리의 접근은 본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신천지는 성경의 비유와 상징을 매우 중요하게 해석하는 단체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실제로 상징과 표상이 매우 많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상징을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신천지는 상당수의 상징을 특정 시대의 역사, 특정 인물, 특정 단체, 그리고 자기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에 대응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성경 전체가 현대의 특정 공동체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특정 단체를 설명하기 위한 암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전체를 관통하는 영원한 질서입니다. 물은 언제나 진리를, 빛은 언제나 신적 진리를, 불은 언제나 사랑을, 산은 사랑의 높은 상태를, 바다는 자연적 인간을 나타내는 식입니다. 이러한 상응은 어느 시대에도 동일하며, 어느 교단에도 독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속뜻 역시 어느 특정 조직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거듭남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차이는 요나서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요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설명하고, 니느웨를 회개해야 할 악한 성읍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는 맞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요나는 곧 우리 자신입니다. 니느웨 역시 우리 자신입니다. 다시스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폭풍도 우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물고기도 우리 안의 영적 상태입니다. 박넝쿨도 우리 마음속에 자라는 자연적 위안입니다. 벌레도 우리 안의 미세한 자기애입니다. 동풍도 주님의 사랑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서는 과거 어느 한 선지자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영적 여정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시선을 밖에서 안으로 돌립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 ‘저 단체가 니느웨다’, ‘저 시대가 심판받는다’라고 읽기보다 먼저 ‘내 안에 요나가 있는가?’, ‘내 안에도 아직 순종하지 않는 마음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내 정의를 더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묻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언제나 타인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번 설교가 마지막까지 ‘회개하고 사랑을 실천하자’는 권면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분히 귀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사랑 자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용서하려 합니다. 다음에는 용서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마침내는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처음에는 선을 행하려고 애씁니다.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거듭남이란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의 변화는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생명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번 설교는 하나님의 긍휼을 비교적 따뜻하게 전하고 있으며, 요나서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나 도덕적 교훈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이 일관되게 보여 주듯이, 성경의 참된 목적은 과거의 사건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오늘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주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서는 단지 ‘회개한 니느웨’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한 사람의 완고한 마음을 천천히 변화시키시는지를 보여 주는 놀라운 거듭남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2,700여 년 전, 니느웨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 쓰여지고 있습니다.

 

 

 

SY.42, ‘목사님, 그동안 제가 낸 헌금 모두 돌려주십시오’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헌금을 돌려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장로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를 회복해 가는 목회 이야기입니다

bygrace.kr

 

SY.40, 변승우 목사,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 아래 유튜브를 먼저 보신 후, 해설로 가시기 바랍니다. 변승우 목사는 로마서 8장 2절을 중심으로 매우 긴 설교를 이어 갑니다. 설교의 핵심은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입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