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54, 전광훈 목사, 20260809,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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