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55, 서사라 목사, ‘하나님께 묻는 자와 묻지 않는 자의 결말’ (2019010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서사라 목사의 ‘하나님께 묻는 삶’
이 설교는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 이야기와 마태복음 7장 12절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요한 태도를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곧 ‘하나님께 묻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병들었을 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묻지 않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태도’라고 전개합니다. 설교 후반으로 갈수록 이 ‘묻기’는 단순히 성경을 읽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차원을 넘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말, 그리고 마음속으로 즉시 들어오는 응답까지 포함하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의사소통으로 발전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번 설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입니다.
먼저 이 설교의 중심 명제 자체에는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상당히 깊게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만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신의 삶이 주님에게서 비롯되고 주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오류 가운데 하나는 proprium, 곧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의지하며 스스로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참된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사라 목사가 반복해서 말하는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하시야 이야기를 선택한 것도 이 점에서는 적절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아하시야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 관한 답을 어디에서 구했느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여호와를 떠나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를 영적으로 넓혀 읽으면 인간이 삶의 근원과 방향을 주님에게서 찾지 않고 자기 지성, 세속적 판단, 욕망, 미신, 또는 다른 어떤 피조된 것에서 찾는 상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질문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 됩니다. ‘나는 실제로 무엇을 최종 권위로 삼으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통찰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 애정과 욕망에 따라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그 사람의 사랑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옵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무엇을 참이라고 보고,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하는지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혹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르지 않은가?’ 하고 자신을 살피는 태도는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의 ‘묻는 사람’은 단순히 신비한 응답을 많이 받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게 보면 자기 뜻을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도 있습니다. 서사라 목사는 성경에 이미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용서를 명한다면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용서할까요?’라고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디로 이사할 것인가’, ‘어느 대학에 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처럼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적혀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개인적 계시나 음성이 성경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존중하려는 질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면 ‘꿈’, ‘환상’, ‘직접적인 말씀’, ‘설교’, ‘다른 사람의 입’, 그리고 훈련이 깊어질 경우 질문하자마자 마음속으로 오는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답하신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은 예전에는 응답을 얻기 위해 금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훈련이 많이 되어’ 물으면 거의 즉시 응답이 온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그리고 청중에게도 자주 묻는 훈련을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깊어지고 응답을 더 빨리 알 수 있다고 권합니다.
여기서부터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할 것입니다. 영계로부터 인간에게 생각과 애정이 흘러들어온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애정이 인플럭스를 통해 들어온다고 끊임없이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을 ‘생산한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흐름 가운데 살아갑니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마음 안으로 어떤 생각이 들어온다’는 서사라 목사의 경험 자체를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곧바로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어떤 생각이 내 안에 분명하게 들어왔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판단은 전혀 같은 명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이해에서는 오히려 이 둘을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영들과 천사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고, 악한 영들을 통한 인플럭스도 있으며, 자신의 기억과 애정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경험되는 수많은 사고도 있습니다. 더욱이 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사람의 생각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출처를 모르면 그것을 완전히 ‘내 생각’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강렬하거나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서사라 목사의 ‘자꾸 묻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 방식을 알게 되고, 훈련되면 거의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표현은 장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은 분명합니다. 하루의 삶을 주님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작은 일에서도 주님을 생각하며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는 훈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주일예배나 교리적 고백에 가두지 않고 일상 전체로 가져오게 합니다. ‘갈까요, 말까요, 이것을 할까요, 저것을 할까요’ 하는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면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질문 → 내면의 응답 → 하나님의 뜻 확인’이라는 거의 자동적인 체계로 굳어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수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생긴 생각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반복적으로 어떤 응답을 기대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응답’이라고 해석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응답을 얼마나 빨리 듣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진리와 선에 의해 얼마나 새로워지고 있느냐입니다. 천국은 음성을 잘 듣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더 깊게 바꾸어 표현한다면, ‘주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계속 신비한 신호를 요구한다’기보다 ‘말씀 앞에서 자기 욕망과 판단을 내려놓고, 이성과 자유를 사용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살피며,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행할 힘을 주님께 구한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듭니다. 주님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매 순간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며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마침내 자기 생명처럼 살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서도 중요합니다. 설교를 그대로 밀어붙이면 자칫 ‘하나님께 물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묻지 않아서 실패했다’는 구조로 들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는 ‘우리 인생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취지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섭리는 이렇게 단선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히 사는 사람도 외적으로는 실패할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에게 항상 외적 성공의 정답을 알려 주는 체계가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실수와 고난까지도 허용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인도하시는 무한히 깊은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묻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다’보다 ‘묻는 사람은 실패 속에서도 주님에게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더 깊습니다. 다윗 역시 늘 완벽한 선택을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 죄를 범한 뒤에도 다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모든 선택에서 초자연적 정답을 미리 전달받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깨달을 때 그것을 자기 합리화로 덮지 않고 주님의 빛 가운데 인정하며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설교 후반의 ‘영에 속한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며, 먼저 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자동자막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지만 전체 문맥에서는 이 뜻이 비교적 분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영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겉 사람에게 즉각 솟아나는 충동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속 사람의 더 높은 원리 아래에서 그것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분노가 올라온다고 곧 말하지 않고, 욕망이 생긴다고 곧 행동하지 않으며, 자기 판단이 옳아 보인다고 즉시 결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다만 그 ‘멈춤’의 다음 단계가 반드시 ‘어떤 내적 음성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 양심, 이성적 숙고, 이웃에 대한 체어리티, 책임, 현실적 조건을 함께 살피는 것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보다 낮은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보존하면서 역사하십니다. 사람이 모든 결정을 직접적인 음성에 의존하게 되면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를 충분히 사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라 목사의 설교와 스베덴보리 사이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비가 생깁니다. 서사라 목사의 언어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대화적’입니다. 사람이 묻고 하나님께서 답하시며, 그 응답을 알아듣는 능력이 훈련을 통해 발달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끊임없는 교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통은 대부분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 선을 흘려보내시고, 천국을 통해 진리를 비추시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을 마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그의 자유를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강렬한 체험보다 오히려 어느새 선을 사랑하게 되고, 진리를 기뻐하며, 악을 싫어하게 된 변화가 주님의 임재를 더 깊이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사라 목사의 영적 체험 전체를 앞으로 살펴볼 때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을 보았는가’, ‘무슨 음성을 들었는가’, ‘누구를 만났는가’만으로 참과 거짓을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됩니다. ‘그 체험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자기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외적 현상에 집착하게 하는가, 아니면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게 하는가? 개인에게 주어진 말을 절대화하게 하는가, 아니면 말씀의 보편적 진리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가?’ 결국 영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열매는 그 체험의 화려함이 아니라 사랑과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설교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중심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므로 내가 알아서 산다’는 태도에서 벗어나, ‘주님이 나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점입니다. 또한 성경에 이미 명백히 주어진 명령을 개인적 응답으로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구분도 중요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의 뜻을 구하라는 권면 역시 거듭남의 실제와 접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묻는다’를 ‘내면에서 특정한 문장 형태의 응답을 받아내는 것’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는 보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이성을 통해, 이웃을 통해, 현실의 질서를 통해, 때로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섭리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인도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개별 질문에 대한 즉답보다, 그 사람이 선한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데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설교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버려야 할 핵심 메시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심은 상당히 소중합니다. ‘주님께 묻고 살아라.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 주님을 네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 다만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면 훨씬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네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곧바로 주님의 음성이라고 여기지는 말라. 말씀의 진리와 선, 이웃 사랑, 이성과 자유 안에서 그것을 살펴라.’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 묻는 삶’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라고 답을 받아 움직이는 삶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거듭남을 거쳐 주님의 뜻이 점차 자기 마음의 사랑이 되고, 그래서 특별한 음성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진실을 선택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는 상태에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부모에게 매 순간 ‘이거 해도 돼요?’라고 묻지만, 성장할수록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여 묻지 않아도 그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의 성숙도 어쩌면 그와 같습니다. 주님께 묻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기 생명 안에 새겨져 살아 있는 ‘대답’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번 서사라 목사의 첫 설교가 앞으로 이어질 천국·지옥 체험 해설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이 설교만 보아도 서사라 목사의 신앙세계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인간은 그 음성을 실제로 듣고 분별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매우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의 천국 방문, 주님과의 대화, 천국 인물들과의 만남 등을 살펴볼 때도 결국 핵심 질문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경험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않고, ‘영계로부터 오는 경험은 어떤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할 때 서사라 목사의 증언을 성급히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체험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균형 잡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