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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58,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5강 (7/29), 시흥영성수련원

bygracetistory 2026. 8. 11. 20:44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5 1

말씀을 아는 것에서 말씀으로 사는 것으로 : 연단과 양심의 빛을 중심으로

이번 5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사가 신앙을 단순히 ‘진리를 알고 믿는 일’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실제 삶으로 가져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강의의 중요한 명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선한 지식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연단을 받는다’, 그리고 ‘선한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연단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말씀대로 실제로 살려고 하는 순간 사람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 때에는 사랑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분노가 올라오고, 참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는 동의하지만 실제로 참아야 할 상황이 오면 불평과 짜증이 솟아납니다. 강사는 바로 이 지점을 ‘연단’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되는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의지와 행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렇게 삶이 된 진리만이 사람에게 실제로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이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진리가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 진리와 반대되는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싸움, 곧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말씀을 실천하려 하면 불편한 환경이 온다’는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의 구조와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불편한 환경을 만들어 보내신다기보다, 섭리 가운데 허용된 삶의 환경을 통하여 이미 사람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떤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보내신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 후반에서도 강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원수를 붙여 주신다’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말을 조금 다듬는다면, ‘주님은 우리가 받은 진리가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진리와 반대되는 사랑들이 드러나는 상황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외부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하여 내 안에 이미 있던 분노와 자기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강사의 다음 설명이 더욱 의미 있어집니다. 연단받을 환경이 왔을 때 불평과 짜증이 올라오고 그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면 연단의 기회를 피한 것이라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나는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 영성 훈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연결하여 읽을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순히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안의 어떤 악을 실제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다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악이 드러나는 순간은 반드시 실패의 순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악을 보고 주님 앞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거듭남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강의가 말하는 ‘양심의 빛’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양심을 사람의 ‘지성, 감정, 의지’를 밝혀 주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고 말합니다. 이어 히브리서 5장 14절의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을 인용하여, 말씀을 실천하고 연단받을수록 양심이 밝아져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중요한 영적 통찰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교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것을 점차 분별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퍼셉션’을 구별하면 이번 강의를 더욱 정교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있었던 것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선이며 참인지를 내적인 방식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받아들인 진리와 선이 내면에 자리 잡아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절대적인 판별 장치가 아닙니다. 어떤 진리를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양심의 질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어겼을 때 실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니까 하나님의 소리다’라고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 자체도 말씀의 참된 진리에 의해 형성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연단을 받을수록 양심의 빛이 더욱 밝아져서 선과 악을 더욱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따라 살면서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칠수록, 주님께서 그의 내면을 더욱 열어 주시며 그 결과 선과 악, 참과 거짓을 더욱 섬세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아지는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어떤 영적 감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특히 강의가 ‘말씀의 실천’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 말씀을 실천하는 거예요’라고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 바로 사랑과 분리된 신앙, 곧 삶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선으로 옮겨지고, 선이 행위가 되며, 그것이 반복되어 삶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의의 ‘말씀 → 실천 → 내적 저항의 발견 → 회개 → 변화 → 더욱 밝아진 분별’이라는 흐름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면을 상당히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천국에 들어갈 만큼 100% 완전히 밝아져야 한다’는 강사의 표현에서는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99.9도 안 되고 100% 완전히 양심이 밝아져야’ 가나안, 곧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람이 지상에서 모든 악의 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그렇게 수학적인 완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사랑을 자신의 주된 사랑으로 삼았는가, 다시 말해 그의 생명을 지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 안에는 악으로 기울어지는 proprium이 남아 있으며, 천사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자기 힘으로 100% 정결해진 사람들의 나라’라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중심이 되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더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인간이 자기 안의 악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완벽하게 제거한 다음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실제로 악을 물리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승리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인간의 협력과 책임을 조금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원의 능력과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강의의 ‘연단’이라는 말도 조금 더 깊어집니다. 연단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진리를 붙들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과 거짓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연단의 본질은 ‘고난의 양’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이루어지는 내적 선택’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뒤에서 말하는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입니다’라는 말은 이번 5강 1부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문장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악한 영들과 지옥의 인플럭스를 실제적인 것으로 가르치므로 모든 악을 단순히 인간 심리 내부의 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지옥이 사람을 강제로 악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악의 인플럭스가 사람 안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곧 타락한 proprium과 결합할 때 그것이 ‘나의 악’으로 활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싸움의 중심은 언제나 ‘저 사람이 문제다’에서 ‘이 일을 통해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고 있는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가장 깊은 연단은 원수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 때문에 드러난 내 안의 미움, 보복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기 의, 우월감과 싸우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의 역시 뒤이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자꾸 보고 고치려고 노력해야 된다’고 말하며, 이것을 ‘우리의 옛사람 애굽의 근성을 죽이는’ 과정, ‘자아를 깨뜨려 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 역시 표현상의 차이를 잠시 내려놓으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실제와 매우 가까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5강 1부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진리는 삶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낸다.’ 말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이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타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다가 무시당했을 때 분노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질에 초연하다고 생각하다가 손해를 볼 상황이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바로 그 순간이 실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안에 아직 이것이 있다’고 보여 주시는 거듭남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말씀의 실천 → 연단 → 양심의 밝아짐 → 선악의 분별’이라는 큰 흐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100% 완전 정결을 달성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간적 완성론으로 가져가기보다, ‘말씀의 진리가 삶이 되고, 그 삶 속에서 악이 드러나며, 사람이 주님을 의지하여 그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는 가운데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성이 형성된다’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훨씬 깊어집니다. 연단의 목적은 사람이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아무 선도 나오지 않음을 점점 더 알고, 그러면서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빛이 밝아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밝아진다’기보다, 내 안에서 주님의 빛을 가리던 것들이 하나씩 물러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또한 더 스베덴보리적입니다.

 

 

5 2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 ‘광야의 세 차례 연단과 거듭남의 여정

5강 1부에서 강사는 ‘말씀을 실천해야 연단을 받는다’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으며,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회개하면서 양심의 빛이 점점 밝아지고 선악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 개인적인 경험을 성경 전체의 거대한 그림 하나에 올려놓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단순한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역사로 읽지 않고 한 사람이 구원받고 성장하여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되는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세 차례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는 데 주목하면서 이것을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할 ‘세 차례 연단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가지고 읽는 독자는 아마 상당히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적 사건을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는 기본 방향 자체가 스베덴보리에게 매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해석의 세부 내용은 앞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광야-가나안’을 단지 수천 년 전 민족사의 지리적 이동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과 거듭남의 질서로 읽는다는 발상 자체에는 매우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강사의 도식에서 애굽은 사람이 아직 육적이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와 연결됩니다. 출애굽은 거기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며, 광야는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훈련되고 연단받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 잡은 상태, 곧 ‘익은 열매’와 ‘이기는 자’의 상태로 연결됩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즉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완성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중요한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실제로 거듭났다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듭남을 위한 필수적인 시작이지만, 그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사랑이 되고 실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반드시 시험이 따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있기만 할 때에는 자기 안에 있는 반대되는 사랑들이 그대로 숨어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하면 옛 의지와 새로운 의지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도 읽을 때에는 아름답지만 실제로 깊은 상처를 준 사람 앞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제 손해가 닥치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일종의 빛과 같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광야가 필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특히 이 광야의 여정을 ‘세 차례 연단’으로 구조화합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사건, 두 번째는 아말렉과의 전투, 세 번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력한 적들과의 전투입니다. 다른 부분에서는 이 세 단계를 요한일서의 ‘아이들-청년들-아비들’의 성장 단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의 싸우지 못하고 두려움 가운데 도망가며, 두 번째에서는 실제로 적과 싸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단계로 성장하고, 세 번째에서는 더욱 강한 적들과 싸우며 마침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는 단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에서 흥미로운 것은 영적 성장을 ‘악이 점점 줄어들어 편안해지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성장할수록 더 깊은 싸움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싸울 힘조차 없어서 도망가던 사람이 조금 성장하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하고, 더 성장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적과 맞닥뜨립니다. 이것은 영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역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왜 시험이 더 깊어지는가, 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악이 오히려 더 많이 보이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층이 열리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험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불일치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속사람을 열어 가실수록, 겉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선과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싸움이 있으려면 싸울 두 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에는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선과 진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proprium과 결합된 악과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초기에 별다른 내적 갈등이 없었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보이기 시작하며, 이전에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기애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양심의 형성과 함께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세 차례’라는 숫자를 실제 영적 성장의 고정된 단계처럼 사용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시험을 거친다고 문자적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셋’은 말씀의 상응 안에서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된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세 차례 전투’를 인간 거듭남의 완전한 시험 과정의 표상으로 읽을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영적 생애를 정확히 세 번의 시험으로 나누는 심리적 시간표로 고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애 가운데 몇 번의 매우 큰 시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작은 시험들이 오랜 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서도 동일한 악이 여러 형태로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그 사람의 유전적 성향, 삶의 환경, 받아들인 진리와 선, 자유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의 깊은 영적 의미를 존중하되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획일적인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싸우는가’입니다. 출애굽기의 첫 번째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립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거듭남의 가장 근본적인 비밀 하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은 싸우지만 실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초기에 사람은 자기 안의 악이 얼마나 강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면 되지’, ‘화를 내지 않으면 되지’, ‘욕심을 버리면 되지’ 하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싸움에 들어가면 자기 의지력이 얼마나 약한지 발견합니다.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면 다시 분노하고,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명예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점점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나는 나를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절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듯, 인간도 자기 힘으로 자기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열린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반복하여 말하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결단하고 싸우고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광야는 ‘내가 얼마나 강한 영적 사람이 되는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주어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옵니다. 자기 힘으로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선과 진리는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선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동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오늘도 자기 힘으로 그 진리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흘러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말하는 ‘연단’은 단순한 정신력 강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광야에서 강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자기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새로운 사람이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전쟁을 잘하는 백성이 되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이 점점 자기 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악과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영적 할례를 받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 곳간에 추수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이 표현은 이후 강의에서 매우 중요해지므로 지금부터 정확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가나안 입성은 상당히 완성된 성화 상태를 가리킵니다.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을 이루며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의 세 연단은 그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가나안’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교회, 천국적인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 사람 안에서 모든 악의 가능성이 존재론적으로 제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지배 질서가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예전에는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람을 지배했지만, 거듭남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악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하는 생명의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화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바꿉니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으므로 이제 익은 열매다’라는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자기확신 자체가 새로운 proprium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겸손조차 자기 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섬세합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완성도를 측정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도식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힘이 없습니다. 청년의 상태에서는 실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아비의 상태에서는 더 깊은 선과 지혜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계적인 세 단계로 고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거듭남에 실제로 서로 다른 상태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좋은 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남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의 연속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성경의 역사적 이야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인간의 거듭남을 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 야곱의 삶, 요셉의 이야기, 출애굽, 광야, 가나안 정복이 단지 각각 떨어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주님의 영화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출애굽과 광야를 인간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볼 때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두 방식의 중요한 차이도 나타납니다. ‘핵심진리’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영적 성장의 모형으로 연결하면서도 그 연결을 주로 신앙적 유비와 성경구절 간의 조합을 통해 구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일정한 상응의 질서가 있으며, 인물·장소·숫자·사건 하나하나가 그 질서 안에서 연속적인 속뜻을 이룬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출애굽을 영적 성장으로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토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알고 읽으면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을 더 공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와 비슷하니 결국 같은 것이다’라고 성급하게 동일시할 필요도 없고, 세부 해석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안의 영적 통찰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먼저 ‘이 해석은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속뜻의 질서를 통해 어디까지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번 부분에서 그 공통된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오늘의 신앙 언어로 바꾸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해서 거듭남의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그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고, 삶 속에서 자기 안의 악이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이 긴 과정이 광야입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구원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광야가 있습니다. 만나도 광야에서 주어졌고, 반석의 물도 광야에서 주어졌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광야에서 함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존이 벗겨지고 주님의 인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시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주님에게서 멀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주님께서 더 깊은 곳을 다루고 계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5강 1부에서 다룬 ‘양심의 빛’과도 연결됩니다. 빛이 밝아질수록 자기 안의 어둠이 더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나는 점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의 proprium이 얼마나 깊은지 더 잘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시는 분이 바로 그것에서 건져내시는 주님이심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번 5강 2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며, 광야는 주님께서 진리를 삶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의 proprium을 드러내고 질서 있게 하시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그의 생명을 다스리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말하는 ‘세 차례 연단’도 훨씬 풍성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몇 번째 연단에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내 안의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첫 번째이든 두 번째이든 세 번째이든, 또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작은 시험 가운데 하나이든, 모든 거듭남의 싸움에서 실제로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그분이 열어 주신 길을 자유롭게 걸어갈 뿐입니다.

 

다음 5강 3부에서는 강사가 이 ‘세 차례 연단’을 훨씬 구체적으로 펼쳐 가는 부분을 따라가겠습니다. 특히 ‘바로의 군대-아말렉-가나안 입성 전의 강적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지, 그리고 ‘아이-청년-아비’라는 성장 단계와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부터는 공용복 선생의 실제 연단 사례도 점차 등장하기 때문에, ‘핵심진리’가 말하는 영적 성장론의 독특한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5 3

첫째, 둘째, 셋째 연단 : 싸움의 대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강 2부에서는 강사가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한 사람의 영적 성장 과정으로 읽는 큰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고, 광야는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연단받는 과정이며, 가나안은 그 과정을 지나 ‘익은 열매’, 곧 ‘이기는 자’가 되는 상태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강사는 이 광야의 과정을 조금 더 세분하여 ‘세 차례 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설명합니다. 첫째 연단은 애굽에서 나온 직후 바로의 군대에게 추격당하는 사건, 둘째 연단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는 사건, 셋째 연단은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강력한 적들과 싸우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전투가 세 번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는 이 세 전투를 통하여 신앙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이 죄와 싸우는 방식과 깊이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오랫동안 종으로 살았고, 이제 막 바로의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 단계에서 백성은 스스로 싸워 승리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여셔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은 그 길을 지나가며,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군대는 물에 잠깁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갓 출발한 사람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아직 죄와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깊은 악과 거짓의 습관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 믿었으니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성질과 욕망과 습관들이 다시 뒤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분명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옛것이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기도 합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왜 아직도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가? 왜 예전 성질이 그대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구별 하나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겉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던 악과 거짓의 질서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일치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속사람 쪽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는데 겉 사람에는 오래된 습관과 애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이 둘이 실제로 질서를 이루도록 하는 긴 과정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과 ‘애굽이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스라엘이 자기 능력으로 애굽 군대를 무찌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에 비추어 보면 아주 중요한 원리가 드러납니다. 거듭남의 모든 싸움에서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 실제로 노력해야 하지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거듭남마저 proprium의 사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연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다가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은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가만히 애굽 쪽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이 알아서 가나안으로 옮겨 주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에서 반복하여 강조하는 매우 독특한 균형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인플럭스가 여기에서 함께 작용합니다.

 

이제 두 번째 연단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실제로 싸웁니다. 첫 번째 연단에서는 도망하던 백성이 이제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청년’의 단계와 연결합니다. 신앙의 초기에는 무엇이 죄인지조차 잘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말씀을 알고 선악을 분별하며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양심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싸움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래에서 싸우고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듭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고 이스라엘이 승리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이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의 근원이 인간의 전투 능력 자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사건에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인물과 사건 하나하나는 상응을 통해 속뜻을 품고 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 역시 단순한 도덕적 교훈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을 들면 기도가 강해져 이긴다’는 식으로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현재 강의가 말하려는 영적 성장의 문맥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아래에서 실제로 싸우지만 승리는 위에서 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원리와 잘 연결됩니다.

 

여기서 ‘청년’의 영성에는 한 가지 위험도 있습니다. 싸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라고 하던 사람이 몇 가지 욕망을 이기고, 기도생활이 안정되고, 말씀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조언도 할 수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이제 꽤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자기애가 종교적인 자기애로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개념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proprium은 반드시 돈과 성욕과 명예 같은 노골적인 욕망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를 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깊다’, ‘나는 시험을 많이 이겼다’, ‘나는 성화되었다’는 생각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적 욕망과 싸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proprium을 발견하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성장이란 ‘점점 내가 강해지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실제로 더 절제할 수 있고, 더 분별할 수 있고, 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구나’를 더욱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 커졌다고 느껴 주님에게서 독립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자유롭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연단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강사의 구조에서 세 번째 연단은 가장 깊고 강한 싸움입니다. 이제 단순히 애굽에서 도망치거나 광야에서 아말렉 하나와 싸우는 정도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강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아비’의 단계와 연결하고, 결국 죄성의 깊은 뿌리까지 다루어 ‘익은 열매’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납니다. 가나안에서 멀리 있을 때보다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싸움이 더 어려워집니다. 만일 영적 성장을 단순히 ‘점점 문제가 없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이 층층이 열리는 과정이라고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악부터 다루어집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노골적인 분노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 질서 안에 들어오면 더 미세한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선을 행하고도 그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는 마음 등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전보다 자기 안의 악이 더 많이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더 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이 더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지만 햇빛이 강하게 들어오면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먼지가 보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 점은 5강 1부에서 살펴본 ‘양심의 빛’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양심의 빛이 밝아질수록 선악을 더 세밀하게 분별하게 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이런 의미에서는 매우 깊습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선악만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말의 선악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말과 행동을 낳은 동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옳은 말을 했지만 왜 그 말을 했는가? 상대를 살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가?’라는 데까지 들어갑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목적’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행위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목적, 그 목적에서 나오는 생각과 수단, 그리고 최종적인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에 따라 영적인 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일 수 있고,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헌금도 체어리티에서 할 수 있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도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할 수 있고 자기 명성을 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연단을 단순히 ‘더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다’고 이해하기보다 ‘더 깊은 사랑의 층이 시험받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의미가 깊어집니다. 겉 행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거듭남의 핵심은 행동 목록 몇 가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다만 강사가 이 세 번째 연단을 지나면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중요한 구별을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실제적이며 매우 깊은 변화입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선이 사람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변화가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하여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어떤 악의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천사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 안으로 주님에게서 선이 흘러들어 온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사입니다. 만일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가 한순간이라도 끊긴다면 누구도 스스로 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완성은 ‘이제 나는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가 아니라 ‘나는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유롭게 인정하며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이 ‘익은 열매’라는 말을 읽을 때도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열매는 분명 익어야 합니다. 진리가 단지 지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선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생명을 받아 열매를 맺듯 인간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님께서 하셨다’고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강사가 첫째·둘째·셋째 연단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결국 ‘싸움 없이 성숙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단순히 마음의 위로나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지 않고, 실제 인간의 성품과 사랑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고백 이후에도 광야가 있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분명하게 합니다. 싸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을 겪었다

 

 

 

5 4

내 속에 거하는 죄와 전적 부패 : 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영에 뿌리박힌 실체인가

5강은 이제 연단이 왜 필요한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 안의 죄 문제 그 자체로 깊이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 ‘숨어 있던 것’의 정체를 ‘죄성’이라고 부르면서 로마서 7장 20절,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강사의 해석에 따르면 사람이 선을 행하려고 결단했는데도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마음속에서 ‘죄의 법’이 일어나 결국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 타락’, ‘전적 부패’라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말을 단순히 ‘사람은 죄를 많이 짓는다’는 정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훨씬 구조적으로 이해합니다. ‘원죄가 영 속에 뿌리박혀서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에 죄의 법칙이 능력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가 바로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라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 죄성이 잠잠해 있어서 자신도 그것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한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이 발동하여 마음을 지배하고 마침내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강의에서 든 예를 따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앞으로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진리가 양심에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합니다. 강사는 바로 그 순간을 ‘죄성이 발동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말씀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이 죄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에 말씀을 거역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중요한 영적 관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기 안의 어둠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성질대로 살면서 화를 낼 때에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누구나 그렇지’ 하고 지나갑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금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실제로 살려고 하면 이전에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갑자기 문제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죄를 드러낸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있던 어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서도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오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의지의 상태가 점차 드러납니다. ‘나는 이 진리가 참되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내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가?’라는 갈등이 생깁니다. 이것은 오히려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선과 악이 구별되지 않던 상태에서 이제 둘이 서로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인간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죄성을 ‘내 영 속에 뿌리박힌 것’, 더 나아가 ‘영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음란성, 시기, 혈기, 아집, 교만 같은 죄성이 인간 안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설명하고, 이것을 ‘원죄’, ‘부패성’, ‘유전죄’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간의 가장 내적인 영 자체에 악의 실체가 뿌리를 박고 있다는 그림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듬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 곧 inmost는 악이 뿌리박혀 있는 장소라기보다 주님께서 인간 안으로 유입하시는 가장 깊은 입구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 자체를 ‘죄악으로 오염된 핵’처럼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와 잘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인간에게 유전적 악이 있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C 전체에서 유전적 악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법적 ‘죄책’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향한 성향, 곧 악을 사랑하기 쉬운 경향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 죄책이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전가되었다’는 전통적인 원죄론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자기 삶으로 만든 악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공용복 선생의 설명 가운데 흥미로운 접점도 보입니다. 강의 자료에서 ‘원죄’라고 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행위 자체’를 원죄라고 하지 않고, 그 타락을 통하여 인간에게 들어온 ‘죄성’, 곧 ‘부패성·유전죄’를 원죄라고 구별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는 그들의 ‘자범죄’이고, 이후 인간에게 유전되는 죄의 성향을 원죄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죄성이 들어왔다’는 구조는 스베덴보리와 다르지만, 조상의 범죄 행위 자체와 후손에게 이어지는 악의 성향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해석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아담은 지구상 최초의 한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태고교회, 곧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한 사람 아담이 역사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그 순간 어떤 죄성이라는 것이 인류의 영 속으로 들어왔다’는 구조 자체가 AC의 창세기 속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떠나 감각과 자기 이성, 곧 proprium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타락해 갔는가를 말씀의 속뜻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유전적 악은 일종의 ‘영적 유전자 속 죄 물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 축적되어 내려오는 사랑과 애정의 기울어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경향, 세상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경향을 갖습니다. 이것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지고 반복될 때 개인의 실제 악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죄로 여기고 거부하면 그 악은 비록 유전적 경향으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지배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proprium’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하다’, ‘내가 옳다’고 느낍니다. 이 자기 것이라는 감각 자체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이 있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실제 자기 소유라고 믿고 주님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 proprium은 악과 거짓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죄론은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악한 물질이 박혀 있다’는 그림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려는 proprium의 질서’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이 설명을 잘못 들으면 ‘그렇다면 인간에게 악은 별로 심각하지 않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집요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핵심진리’와 만납니다. 강사는 완전 타락과 전적 부패를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죄 상태’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나는 어쩔 수 없구나’라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의 방향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도 한 가지 균형을 놓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악과 싸울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분노가 올라오면 말을 삼켜야 하고, 거짓말할 기회가 생기면 진실을 말해야 하며, 탐욕이 올라오면 실제 행동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내가 내 의지력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의 균형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죄성이 환경을 만나면 발동한다’는 관찰은 스베덴보리의 시험론으로 조금 바꾸어 읽으면 상당히 유익해집니다. 평소에는 자기 안의 어떤 악한 애정을 모르고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거나, 무시당하거나, 성적 유혹을 받거나, 권력을 가질 기회가 생기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숨어 있던 사랑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환경이 그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그 환경을 통하여 이미 자기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기 상태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권력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이 자기는 돈에 초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비판하지 않을 때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지면 자신도 몰랐던 것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의 환경은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충분히 건질 수 있는 통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때 올라오는 모든 생각과 충동을 곧바로 ‘나 자체’라고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애정과 생각은 천국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유입되고, 악한 애정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자유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절할 것인가를 선택합니다.

 

이 사실은 죄와 싸우는 사람에게 의외로 큰 자유를 줍니다. 갑자기 악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해서 ‘내 영의 가장 깊은 곳이 이것이구나’ 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란한 생각이 스쳤다고 해서 ‘내 본질은 음란한 인간이구나’,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고 해서 ‘내 참된 자아는 살인적인 인간이구나’라고 곧바로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올라왔을 때 내가 그것을 기뻐하며 붙잡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이것은 주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혹과 죄를 동일시하면 신앙생활은 끝없는 자기혐오로 갈 수 있습니다. 시험 가운데 악한 충동이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와 그 악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 안에 그 악과 싸우는 다른 생명이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양편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의 ‘내 속에 거하는 죄’를 ‘내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이 죄다’라고 읽는 것과 ‘내가 선을 원하면서도 나를 끌어당기는 악한 성향이 여전히 겉 사람 안에 있다’고 읽는 것은 영적으로 상당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전자는 ‘나는 본질적으로 죄 덩어리다’라는 자기규정으로 갈 수 있지만, 후자는 ‘내 안에는 내가 싸워야 할 유전적이고 실제적인 악이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과 나를 분리하여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고 계신다’는 거듭남의 관점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우리가 AC에서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를 함께 생각하면 더욱 중요해집니다. 인간 안에 악의 경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의 상태들을 인간 안에 은밀히 보존하십니다. 인간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 리메인스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완전히 부패하여 안에는 오직 죄밖에 없는 존재’라고만 묘사하면 AC가 말하는 인간의 내적 구조 가운데 매우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전적 부패’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사용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만일 이 말이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선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뜻이라면 상당 부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든 층위가 악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의 리메인스조차 없으며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맞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인간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는 강의의 설명입니다. 앞선 강의에서 강사는 정욕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보존하도록 주신 기능이지만 ‘죄성은 마귀의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구별했습니다. 이 말은 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며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참된 창조 목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악이 마귀에게서 어떤 ‘죄성 물질’처럼 인간의 영 속으로 이동해 들어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의 인플럭스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그것에 동의하고 사랑하며 반복하여 자기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의 실제 악이 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죄성이 마귀의 것이니 내가 죄를 지은 것은 결국 마귀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자기에게 유입되는 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면서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책임이 생깁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악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선에 대해서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이 독특한 구조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가 말하는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나는 정말 비참한 신세구나’라는 자기 인식도 어느 지점까지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목적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악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나에게는 주님이 필요하다’로 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말하면,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빛은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자기 안의 악을 끝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어둠을 발견한 이유는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보이는 순간에도 동시에 빛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죄성’ 개념과 스베덴보리의 ‘유전적 악·proprium·인플럭스’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죄는 훨씬 깊다. 환경만 주어지면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기 힘을 믿지 말고 철저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악을 당신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과 동일시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깊은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자유와 합리성을 지켜 주시면서 악을 당신에게서 분리해 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성을 형성하신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보완이 이번 5강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성의 깊이’를 강조하는 강의는 자칫 듣는 사람을 ‘내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거듭남론은 인간의 타락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그보다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이 깊다고 해도 주님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의 유전적 악이 오래되었다 해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앞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연단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오직 악뿐이라면 싸움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악 사이에는 영적 시험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것과 반대되는 악이 움직일 때 갈등이 생깁니다. ‘나는 화를 내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 ‘보복하고 싶지만 용서해야 한다’, ‘거짓말하면 유리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갈등 자체가 이미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5강 1부의 ‘양심’, 2부의 ‘광야’, 3부의 ‘세 차례 연단’, 그리고 이번 4부의 ‘죄성’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진리가 양심에 들어옵니다. 그러자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통하여 광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싸움이 깊어질수록 더 깊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사람은 점점 ‘내 힘으로는 이것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참된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전적 부패’를 ‘나는 존재 자체가 오직 악이다’라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나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으므로 모든 선을 주님에게서 받아야 한다’는 고백으로 읽는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자기 의존의 종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존이 끝나는 자리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제 5강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깊은 죄성이 있다면 성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죄성은 실제로 뿌리째 없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이기는 자’, ‘익은 열매’인가?’입니다. 5강 5부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따라가면서, 공용복 선생의 ‘죄성 제거와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악의 제거, 혹은 악에서의 분리와 거듭남’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5 5

이기는 자익은 열매’ : 성화의 완성은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인가

5강은 이제 지금까지의 연단론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점으로 모읍니다. 강사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의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세 차례의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고 마침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에서는 이런 사람을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곧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성도라고 표현하고, 신앙의 목표를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 여러 성인들의 ‘신인 합일’ 등을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같은 영적 완성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묶습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보아야 할 것은 강사가 구원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으로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믿었다’, ‘구원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실제적인 성장이 있어야 하고, 죄와 싸우며 사랑과 성품이 변화되고, 결국 삶 전체가 주님의 뜻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단지 어떤 교리적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영적 싸움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강사는 고린도전서의 경주 이미지를 가져와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의 연단을 지나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면 ‘이기는 자’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강조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을 단순한 지적 동의로 보지 않고, 진리가 삶이 되어야 하며 악과 거짓을 실제로 물리치는 거듭남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강의는 ‘이기는 자’를 상당히 완결된 상태로 말합니다. 세 차례 연단을 모두 통과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표현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이 사람 안에서는 죄성 자체가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악의 뿌리가 남지 않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 사이에 섬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외적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성이 실제로 새로워지고, 악을 사랑하던 사람이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 역시 성화나 거듭남을 약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유전적 악과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람 안의 악은 주님의 역사로 억제되고 분리되며, 새로운 선의 질서가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의 ‘존재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더 이상 그 사람의 자유롭고 기쁜 사랑의 중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천사에게 적용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선한 존재이지만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 proprium만을 본다면 그 안에는 선이 없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성은 ‘나는 이제 완전히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확신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 그 선 안에서 살기를 사랑한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라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겼는가’입니다. 단순히 욕망 몇 가지를 억제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김은 자기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바뀐 결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오히려 아주 좋은 비유가 됩니다. 열매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무가 뿌리로부터 생명을 받아 충분한 시간 동안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듭남도 한순간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이루어집니다. 익은 열매란 단순히 죄를 많이 안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처음 익은 열매’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익은 열매’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이 단일한 한 시점에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다른 과정과 시기가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구조로 보입니다. 다만 ‘첫 열매’, ‘둘째 열매’, ‘셋째 열매’를 고정된 등급표처럼 이해하면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는 무수한 차이와 상태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영적 등급을 측정하고 자랑하기 위한 체계가 아닙니다. 각 사람은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서로 다른 완전성을 이룹니다.

 

특히 ‘이기는 자’라는 말에는 영적 자부심의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이 ‘이기는 자’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새로운 proprium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일반 성도와 다르다’, ‘나는 세 번째 연단까지 통과했다’, ‘나는 익은 열매다’, ‘나는 성화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생기면, 자연적 명예욕이 종교적 명예욕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성숙의 중요한 표지를 오히려 자기 상태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데서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변화를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용서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조금 더 빨리 내려놓고, 예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 흔들림이 줄고, 예전에는 자기 이익만 보았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선을 함께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는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완성되었다’는 자기 판정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가 웨슬리의 ‘완전 성화’, 존 번연의 ‘전신갑주’, 가톨릭 영성의 ‘신인 합일’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배치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전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실재를 찾으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출발하여 실제로 변화되고, 더 깊은 내적 연합과 성숙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보입니다. 교파별 용어를 그대로 절대화하기보다 그 배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장’의 구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태도에 상당한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외적 교파나 교리의 차이만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어떤 선을 사랑하고 어떤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였는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도 실제 선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해 살았던 사람은 천국적 상태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표현이지만 어떤 공통된 영적 성장의 실재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강사의 직관은 꽤 넓고 포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인 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을 존재론적인 합일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이 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결합(conjunction)은 있지만 동일화(identity)는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 주님과 결합하지만,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압니다. 따라서 ‘신인 합일’을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자유롭게 흐르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이 그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결합’으로 이해한다면 상당 부분 대화할 수 있지만, 인간의 존재가 신성과 하나의 본질이 된다는 뜻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은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본질이 인간의 본질과 혼합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받는 그릇’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진리로 끊임없이 유입하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더 참된 인간이 되지만 주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표현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안에 이제 신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나는 악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읽는 경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내 생명의 중심이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면류관’의 의미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면류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적 상급으로만 이해하면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상을 주신다’는 공로 사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선을 행하는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그 선의 쓰임 안에서 이미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따라서 면류관은 인간의 공로에 대한 외적 보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익은 열매’와도 잘 연결됩니다. 열매가 익었다고 해서 나무가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 맺은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을 행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지만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왔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생명을 막는 악을 죄로 여기고 물리치며 주님의 인플럭스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에는 ‘성화는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는가, 죽은 뒤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도 등장합니다. 일부는 성화를 사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강사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화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게 만납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삶은 사람의 근본적인 사랑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사후에는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드러나고 확정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실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에도 선한 영들이 가르침을 받고 외적인 거짓과 오류가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배적 사랑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회개의 인생이 사후에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 선을 사랑한 사람은 사후에 잘못 배운 교리를 벗고 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상에서 악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한 사람이 단지 죽은 뒤 진리를 배워 천국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의 근본적인 방향은 살아 있는 동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기는 자’라는 말은 미래의 특별한 몇 사람을 가리키는 영적 계급 명칭으로 보기보다, 지금 삶 가운데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물리치고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모든 거듭남의 방향으로 읽는 편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일찍, 어떤 사람은 더 늦게,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시험을 거치지만, 핵심은 모두 같습니다.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완전’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에서도 지혜와 사랑은 영원히 증대합니다. 피조물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적 완전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계속 열려 있는 완전성입니다. 사람의 상태에 맞게 질서가 이루어졌지만 그 질서는 영원히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다시 매우 적절해집니다. 익은 열매는 생명이 끝난 열매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는 씨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성숙은 종착점이 아니라 더 깊은 생명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큰 시험을 통과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자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강 5부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공용복 선생의 ‘이기는 자’ 개념에 덧붙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는 자는 자기 힘으로 죄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영적 강자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자기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보다 누가 이기게 하셨는지를 더 깊이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전신갑주’, ‘신인 합일’, ‘이기는 자’라는 서로 다른 표현들을 무리 없이 한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표현의 가장 깊은 핵심은 인간의 자기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실제 삶 안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악을 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진리를 행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체어리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가 ‘신앙의 목표는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익음’을 자기 상태에 대한 최종 판정으로 사용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실제 삶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 순간 ‘익은 열매’는 영적 엘리트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향하는 겸손한 목표가 됩니다.

 

이제 5강은 이 추상적인 ‘이기는 자’의 개념을 실제 인물들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강사는 소화 데레사처럼 크고 위대한 일을 하기보다 작은 일에서 자기부인과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이기는 자’가 거대한 영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잘 감당한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자료에서도 소화 데레사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5강 6부에서는 바로 이 ‘작은 승리’와 ‘일상의 성화’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6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사람 : 소화 데레사와 생활 속 자기부인

5강은 지금까지 상당히 높은 언어를 사용해 왔습니다.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완전 성화’, ‘세 차례 연단’,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남’ 같은 표현들입니다. 이런 말들을 계속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영적 성숙을 아주 특별한 체험이나 극적인 희생, 혹은 소수의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높은 경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여기서 방향을 아주 현실적인 자리로 돌립니다. ‘큰 원수’보다 ‘작은 원수’, ‘큰 승리’보다 ‘작은 승리’,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을 강조하면서 소화 데레사를 소개합니다. 강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작은 원수들’이 생기며, 그때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같은 말씀을 붙들고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승리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것은 잘 주어지지 않고 작은 것들이 주어진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대목은 5강 전체의 무게중심을 아주 중요한 방향으로 돌려놓습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면서 거대한 영적 전쟁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의 영적 상태는 대단한 집회나 특별한 체험보다 생활 속의 작은 자극 앞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말 한마디, 내 뜻을 거스르는 작은 일, 피곤한데 누군가 부탁하는 상황, 별것 아닌 섭섭함,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서는 사람 앞에 내놓을 만한 ‘영적 업적’도 없고, 누구에게 인정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가 더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강사가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그녀를 ‘크고 위대한 일을 해서 성화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잘 감당해서 익은 열매가 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소화’라는 말이 ‘작은 꽃’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큰 꽃처럼 화려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일들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했다고 소개합니다. 강의가 소화 데레사의 전 생애와 신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은 일의 충실함’이라는 영성의 한 특징을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의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반드시 자연적 삶의 최종적인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이 생각 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하며, 진리도 단지 기억과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삶의 진짜 시험장은 결국 일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작은 일’은 사실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자연계에서의 아주 작은 행위 안에 그 사람의 내적 사랑이 최종적으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마지막 그릇입니다. 따라서 마음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생각을 해도 그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그 안에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들어 있다면 그 행위는 단순히 작은 외적 행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강의에서는 아주 사소한 예까지 듭니다.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순간에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를 문자적으로 ‘몇 시에 일어났느냐’의 영성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훨씬 깊습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과 ‘내가 해야 할 선한 쓰임’이 충돌할 때 무엇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몸에 필요한 충분한 휴식은 선한 질서에 속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게으름 때문에 맡은 책임을 외면한다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욕구가 높은 목적을 방해할 때 그것을 질서 아래 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돌보고 적절히 쉬며, 건강을 유지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최종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을 줄이고, 음식을 줄이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별은 소화 데레사 같은 성인의 금욕적 실천을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시대와 수도원 전통 안에서 행한 구체적인 수행을 그대로 복제한다고 해서 같은 영적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의에서도 ‘어떤 영성가는 두 끼만 먹었다고 하면 나도 두 끼 먹어야지’ 하는 식으로 따라가는 예가 등장합니다. 이런 열심이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사는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외적 행위보다 그 행위의 목적과 사랑을 먼저 물어야 합니다. 같은 두 끼 식사라도 한 사람에게는 절제의 훈련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영성을 과시하는 proprium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 후반에는 이 ‘작은 승리’를 아주 직접적으로 풀어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왔을 때 얼굴을 돌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반갑게 대하는 것, 집에서 ‘원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반찬을 더 정성스럽게 해 주는 것, 배우자가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했을 때 즉시 방어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등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표현은 매우 생활적이고 때로는 웃음을 섞지만, 강의의 핵심은 명확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큰 악령을 쫓아내거나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바로 눈앞에서 자기 사랑의 충동을 꺾고 사랑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체어리티는 막연한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웃의 실제 선을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구체적인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을 때 잘해 주는 것은 자연적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질서를 요구합니다. 바로 그때 ‘내 기분’보다 ‘무엇이 선한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무조건 더 잘해 주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 자체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착취를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과 피해자 모두에게 더 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일을 참아 주는 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때로는 분명하게 경계를 세우는 것이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선 강의에서 남편의 폭력 같은 사례가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중요합니다. 자기부인과 오래 참음을 강조하다 보면 피해자가 폭력을 계속 견뎌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proprium의 보복심을 물리치는 것과 악한 행위를 방치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악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용서하면서도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습니다. 사랑은 무질서한 순응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따른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에게 반찬을 더 맛있게 해 준다’는 강의의 재미있는 예도 그 행동 자체를 규칙으로 만들기보다 그 안의 영적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핵심은 ‘저 사람이 싫으니 나도 일부러 못되게 해야지’ 하는 보복의 proprium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 반감이 올라와도 그 반감이 행동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선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작은 자기부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강 3부에서 말했던 ‘세 번째 연단’의 깊이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큰 악을 버리는 것은 비교적 분명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들어가면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납니다. 표정 하나, 말투 하나, 상대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 내가 옳다는 것을 꼭 확인받으려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적 법으로는 거의 문제 되지 않지만 영적 삶에서는 사랑의 질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작은 일’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 도덕적 완벽주의에 빠져 모든 표정과 감정을 감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방향이 점점 자연적 삶의 작은 부분까지 내려온다는 뜻입니다. 큰 원칙에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순간에도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를 꼭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상대를 살리려는가 아니면 이기려는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 정말 필요한가?’라고 잠깐 멈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개념은 아주 풍성한 보완을 줍니다. 영적 삶의 중심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발견하고 피한 뒤에는 실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실제 선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이기는 것도 ‘나는 나를 이겼다’는 성취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맡겨진 일을 유용하게 행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삶을 자기수련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옮겨 놓습니다. ‘나는 오늘 몇 번 자기를 부인했는가?’를 계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부인조차 자기 영적 성취의 목록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주변 사람에게 어떤 선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입니다. 자기부인은 그 선을 방해하는 자기 사랑을 비켜 세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꽃’이라는 이미지는 아름답게 읽을 수 있습니다. 꽃은 자기가 얼마나 큰지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주님 앞에서 영적 가치는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이름 없는 성도, 큰 기관의 책임자와 가정에서 조용히 가족을 돌보는 사람의 외적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주님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목적을 보십니다.

 

이것은 천국의 쓰임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자기 사랑과 지혜에 맞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합니다. 어떤 쓰임도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겉으로 작아 보이는 쓰임이라고 해서 천국에서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그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충실하라’는 말은 ‘작은 사람으로 만족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큰 책임을 맡기시면 그것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큰 책임을 맡았다고 더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책임이 클수록 자기 명예와 지배욕이 섞일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래서 큰 쓰임일수록 더 깊은 자기부인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목회와 사역에도 매우 직접적인 적용이 있습니다. 수천 명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이 어떤 순간에는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큰 행사에서 사랑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이 더 실제적인 시험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축복기도를 하면서도 자기와 의견이 다른 한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면 아직 사랑이 자연적 삶의 작은 곳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작은 승리’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이유입니다.

 

또한 강사는 ‘작은 일 정도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신경 쓰면 할 수 있다’는 취지로 격려합니다. 여기에도 좋은 목회적 감각이 있습니다. 거듭남을 너무 거대한 목표로만 제시하면 사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칠 수 있습니다. ‘완전 성화해야 한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릴 때, 오늘 내 앞에 있는 작은 하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말을 참는 것, 한 번 먼저 사과하는 것, 한 번 정직하게 말하는 것, 한 번 남의 공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그 작은 선을 행할 때도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를 참았지만 그 힘은 주님에게서 왔고, 내가 친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인정할수록 작은 승리가 proprium의 먹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이기는 사람이다’가 아니라 ‘이번에도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에 또 화를 냈다고 해서 ‘나는 거듭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를 보고 변명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자기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에게 돌아오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 원수’라는 강사의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영적 의미에서 그 작은 원수는 외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내 안의 반응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은 한마디 했는데 내 안에서 하루 종일 분노가 계속된다면, 문제의 중심은 그 한마디만이 아닙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랑, 무시당하기 싫은 proprium, 내가 옳아야 한다는 고집이 함께 움직였을 수 있습니다. 외부의 ‘작은 원수’가 내 안의 더 깊은 원수를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에게 억지로 좋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은 즉시 명령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별개로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해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점차 질서 있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의지와 행동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애정 자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앞서갑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성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그것 때문에 행동을 조절합니다. 아직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행하면, 어느 순간 선을 행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새로운 애정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억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소화 데레사의 ‘작은 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작은 고행들의 수집이라기보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아주 작은 곳까지 선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식탁에서의 말 한마디, 싫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의 태도, 누군가의 결점을 보았을 때의 반응 같은 곳까지 주님의 질서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거대한 관념 속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자연적 선택들 속에서 인간의 생명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번 강의를 보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핵심진리’의 높은 단계론이 여기서는 갑자기 매우 낮고 평범한 자리로 내려옵니다. ‘익은 열매’가 되려면 엄청난 환상을 보아야 한다거나 거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 중요한 중심을 계속 붙들게 합니다. 작은 자기부인의 목적도 결국 자기부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과 쓰임입니다. 내가 참았다는 사실보다 그 참음으로 상대에게 선이 이루어졌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희생했다는 사실보다 그 희생 안에 주님의 사랑이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기부인이 사랑을 위한 길이 아니라 자기 영성을 증명하는 목표가 되는 순간 다시 proprium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강 6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기는 자는 반드시 큰 전쟁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순간마다 자기 사랑보다 선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 작은 승리의 생명조차 자기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승리가 이웃을 향한 실제 쓰임으로 이어질 때 작은 행위 안에 천국의 질서가 자리 잡습니다.’

 

이제 강의는 이러한 ‘작은 승리’에서 다시 더 깊은 자기부인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특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과 고집,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다르게 대하려는 마음, 그리고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원고에서도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더 잘해 주고 자신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을 ‘자기’의 문제로 직접 지적합니다. 5강 7부에서는 바로 이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과 proprium의 관계를 중심으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5 7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 : 남을 보는 사람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으로

5강 6부에서는 소화 데레사를 통하여 ‘작은 일에서 이기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순교나 특별한 영적 사건이 아니라, 보기 싫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고, 배우자의 기분 나쁜 말을 보복으로 되갚지 않으며, 일상의 아주 작은 순간마다 자기 유익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영성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자아가 많이 깨어진 사람’과 ‘자아가 잘 깨어지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강사가 여기서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먼저 보는가?’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상대를 먼저 보고,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예로 듭니다. 대체로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도 있지만, 무엇을 하자고 해도 늘 반대하고 ‘들이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성도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 도움이 필요해졌다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자아가 많이 깨어진 목회자’라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도울 수 있지만, 자아가 많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마음과 행동 어딘가에 차별이 드러난다고 강사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돌립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 잘해 주고 싶고, 나를 들이받는 사람에게는 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안에 있으며,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proprium과 상당히 가까운 곳을 건드립니다. 다만 앞서 여러 번 구별했듯 강의가 사용하는 ‘자아’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완전히 동일한 용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선을 덜 베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내 사랑의 양이 달라지는 상태’는 자기 사랑의 질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proprium과 매우 밀접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닫힙니다. 나를 인정해 주면 더 도와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를 주면 ‘왜 내가 저 사람까지 도와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적 공정성으로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상대가 내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기준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보다 ‘지금 무엇이 선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누가 나에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무조건 똑같이 대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악을 돕는 것은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의 내적 목적이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 선인가’여야 합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분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복과 자기 유익이 판단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의는 이어 더 아픈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앙생활을 도왔던 성도에게 목회자가 ‘배신’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당연하지만, 강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내가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더 의지해서 그랬나 보다’라고 자기 쪽을 먼저 돌아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강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의 원인을 모두 자기 잘못으로 돌리라는 뜻으로 읽으면 위험하지만,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 일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의존과 기대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상당히 깊은 자기 성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꼭 구별해야겠습니다. 상대방의 배신은 상대방의 책임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의까지 ‘내 자아 때문이었다’고 떠안는 것은 건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특히 폭력이나 착취, 학대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자기 성찰은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자기비난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악은 저 사람의 책임이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사람 의존, 인정 욕구, 보답에 대한 기대, 자기 판단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악과 나의 proprium을 동시에 구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강의의 또 하나 인상적인 문장은 ‘자아가 깨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설교 시간에 조는 성도를 예로 듭니다. 자아가 강한 목회자는 ‘어떻게 설교 시간에 저렇게 자는가’ 하고 성도를 탓할 수 있지만, 자아가 깨어진 목회자는 ‘내 설교가 부족해서 조는가 보다’ 하고 먼저 자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성도 역시 ‘목사님 설교가 형편없다’고 먼저 판단하기보다 ‘내가 기도가 부족한가?’라고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역시 문자적인 공식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설교가 매우 부실할 수도 있고, 성도가 전날 밤새 일했기 때문에 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건의 원인을 무조건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진리의 판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강사가 말하는 영적 태도의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기 결백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습니다. ‘나는 맞고 저 사람이 문제다’라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깨어질수록 그 자동적인 방향이 조금씩 바뀌어 ‘혹시 내가 볼 것은 없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아주 깊게 만납니다. 회개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진리에서 시작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우리 장로님이 들어야 하는데’, ‘저 목사가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배우자가 이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먼저 나를 비추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세상의 잘못된 교회를 찾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있는지를 보고, 바리새인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위선을 판단하기 전에 내 안의 자기 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자기 성찰이 지나치면 모든 상황에서 ‘내 탓인가?’만 반복하며 신경증적인 자기분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회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분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악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피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거듭남을 위한 수단입니다.

 

강의의 앞부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이미 나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기는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기보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혈기와 아집과 고집이 강하고 자기반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일수록 연단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이번 7부의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를 본다’는 주제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5강의 성장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속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로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proprium은 언제나 외부를 향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렇게 했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화를 낸 것은 저 사람이 먼저 그랬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물론 외적 원인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외적 원인을 부정하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 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데 왜 그 일이 내 안에서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켰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이 생깁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이 속사람을 향한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습니다. 상대방이 무례했던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면 그 사건은 내 안의 다른 것을 보여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존중받아야 한다’, ‘내 판단은 인정받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는 사랑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자체를 보는 순간 외부 사건이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때 상대방은 더 이상 나의 거듭남을 방해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드러내 준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악을 정당화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모욕한 덕분에 내가 거듭났으니 그 모욕은 선한 일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은 여전히 악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결과를 선을 위해 돌리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강의가 모든 생활 환경이 연단과 성장에 사용될 수 있다고 보는 장점은 살리되, ‘그러니 악한 일이 일어난 것도 하나님이 직접 시키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면 섭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섭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악을 원하시지 않지만 인간의 자유 때문에 그것을 허용하실 수 있으며, 허용된 악 속에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한 사건에서 ‘주님께서 저 사람에게 나를 배신하라고 시키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벌어진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사람 의존이나 명예욕, 보복심을 보게 하시고 거기서 나를 이끌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을 하면 ‘모든 것이 연단이다’라는 강의의 언어도 훨씬 안전하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사는 ‘자아’의 정체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 곧 ‘옛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년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본격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심리 현상이라기보다 말과 태도와 반응이 실제로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은 반드시 외적 삶에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조건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즉시 공격하지 않으며, 상대가 나를 칭찬하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덜 지배받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 자체도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들으면 인간의 자아 자체를 부수어 없애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없애시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나 자유로운 개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참된 개인이 됩니다.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내가 선의 근원이며,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서로 다릅니다. 사랑의 종류도 다르고, 지혜의 형태도 다르고, 맡은 쓰임도 다릅니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오히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성이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말을 ‘개성이 없어진다’, ‘자기 의견이 없어야 한다’,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강의가 목회자에 대한 순종을 예로 들기 때문에 이 구별은 더욱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잘 순종하는 것이 곧 자아가 깨진 증거도 아니고, 목회자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한다고 자아가 강한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양심과 진리에 따라 정중하게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동의했느냐 반대했느냐’가 아니라 그 동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 고집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진리를 위해 양심적으로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다릅니다. 반대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무조건 순종하는 것 역시 참된 자기부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유와 이성이 거듭남의 필수 조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강제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사람이 주님 앞에서 자유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들어가면 강의가 말하는 ‘순종’도 사람에 대한 맹목적 복종보다는 주님의 진리 앞에서 자기 고집을 내려놓는 것으로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귀한 것은 강사가 이 자아의 문제를 목회자에게 먼저 적용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성도를 나중에 차별하지 않는가, 설교 중 조는 성도를 보면서 즉시 그 사람을 탓하지 않는가, 자신이 돌보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성도 통제의 도구로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자 자신의 내면에 적용한다는 점은 분명히 살려서 읽을 만합니다.

 

이것은 앞서 공용복 선생의 제자들에게서 느끼셨다는 ‘핵심진리에 자기 개인의 것을 함부로 섞지 않으려 하는 태도’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받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 태도가 실제 자기부인과 연결될 때에는 귀한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전승에 대한 충실함 역시 스스로 진리를 살피는 자유와 분별을 막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7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자아가 깨어진 사람일수록 자기를 본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을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내 잘못이라고 하라’고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기에 앞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먼저 살펴라’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회개론과 매우 깊이 만납니다. 남의 티보다 자기 들보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자기 들보를 본 뒤에는 그것을 붙들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내가 역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가 회개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주님, 제 안에 이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고 싶습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삶에서 다르게 행동해 보는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해도 맡은 선을 계속하고, 잘못을 지적받으면 한 번쯤 변명하지 않고 들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작은 행동들 속에서 proprium의 지배가 실제로 약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멸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 상태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나를 칭찬하느냐 비난하느냐, 나에게 유익하냐 손해냐가 선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에게 실제로 선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 전체의 ‘성화’가 다시 생활 속으로 내려옵니다. 성화는 어떤 특별한 체험 뒤에 ‘나는 이제 성화되었다’고 선언하는 상태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유익이 아니라 선을 선택하는 데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익은 열매’라는 거대한 표현이 결국 ‘내게 잘해 주지 않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선을 베풀 수 있는가?’라는 아주 작은 질문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한 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 7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진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을 보면서도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안의 자기 사랑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다른 행동을 선택합니다.’

 

이제 강의는 이 ‘자아가 깨어짐’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상태로 연결하면서, 단순히 상대에게 보복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성화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보는 ‘아가페 사랑’과 실제 인물들의 사례로 옮겨 갑니다. 원고에서도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함을 누리는 것’, 그리고 성화된 성도의 목표가 단순한 건강과 물질의 복이 아니라 그런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는 데 있다는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5강 8부에서는 바로 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가페’, 그리고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 및 천적 사랑과 어떻게 구별하여 볼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어가겠습니다.


 

5 8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 아가페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성화의 실제 모습

5강은 이제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을 더욱 적극적인 사랑의 문제로 가져갑니다. 앞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먼저 탓하기보다 자기 안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자기 유익을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강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강의가 성화의 실제 모습을 매우 높은 신비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상태’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앞에서 말한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자아가 깨어짐’이 결국 사랑이라는 한 지점으로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세 차례 연단’과 ‘이기는 자’를 단순히 강한 영적 전사가 되는 과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 그 의미가 수정됩니다. 무엇을 이긴다는 것입니까? 결국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혈기와 아집과 고집, 보복심과 자기 의, 인정받으려는 욕망,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싶은 자연적 애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의가 말하는 성화의 목표는 ‘나는 죄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상태보다, 자기를 거스르는 사람 앞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상태 쪽으로 이동합니다. 이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체어리티(charity)를 생각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진리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향한 실제적인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매우 깊은 교리를 알고 특별한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해도, 가까운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자기에게 손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 지식과 체험만으로 그의 영적 상태를 높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사랑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시험하는 매우 깊은 말씀이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적인 애정으로도 가능합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갖는 데 반드시 거듭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 심지어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조차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랑의 근거가 ‘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에서 ‘무엇이 주님 앞에서 선한가’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이것을 ‘아가페 사랑’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호감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가페’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다고 보기보다, 그 사랑의 실제 질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 역시 단순한 감정적 호감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본질은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더 깊게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감정의 따뜻함보다 훨씬 깊고 질서 있는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원수에게 반드시 따뜻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떠올렸는데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다고 해서 곧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으므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기억과 자연적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상당 기간 남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이유로 상대에게 악을 행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보복을 내려놓고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려 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심하게 모욕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님 앞에서 거절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자기 악에서 돌이켜 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미 사랑의 방향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과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의 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악에서 벗어나 선 가운데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원수의 악을 용납하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사랑은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계속 거짓말하고 사람을 해치고 있다면 그의 행동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든 잘못을 ‘사랑하니까’ 허용한다면 결국 자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시 범죄를 방치하는 것이 범죄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제지하고 책임을 묻는 일이 그 사람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체어리티는 무분별한 친절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된 사랑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사랑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과 악을 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악을 돕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랑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 안의 악까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의가 말하는 ‘원수와도 화평한다’는 것도 더욱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반드시 관계를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깨졌다면 신뢰를 다시 쌓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어떤 관계는 안전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상대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질서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화평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앞부분의 가르침과 ‘원수를 사랑한다’는 이번 부분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상처를 받으면 즉시 자기 정당화를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반드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처받았다는 사실 자체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상처는 실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은 그 상처를 붙잡아 자기 의와 보복심을 키우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받았을 때 그 상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입니다.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로 만드는가, 아니면 주님께 가져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미움과 보복심을 보게 되는 계기로 삼는가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 깊은 곳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기비난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직 그 사람을 생각하면 두렵고 괴로운데 ‘나는 사랑이 없어서 이렇다’고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의 회복과 영적 용서는 서로 관련되지만 반드시 같은 속도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듯, 거듭남의 과정도 사람의 상태를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억지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시작도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을 때 그것을 붙잡지 않는 것,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을 거절하는 것, 그 사람에게 실제 선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부러 마음속에서 저주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5강 6부에서 살펴본 ‘작은 일에서 이기는 것’의 연장선입니다.

 

그렇게 보면 ‘원수 사랑’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영웅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작은 자기부인이 오랫동안 축적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보복하지 않고, 내일 한 번 험담하지 않고, 다음에는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조금이나마 바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필요할 때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먼저 행동을 이끌다가 점차 새로운 애정이 형성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것을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성에 받아들인 진리가 의지를 제어합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 마음에서는 미워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주님을 의지하여 진리에 따라 살면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십니다. 그러면 이전에는 억지로 하던 선을 나중에는 사랑해서 하게 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화를 억누르는 것과 화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처음에는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진리 때문에 입을 다물지만, 거듭남이 깊어지면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 자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용서하려 하지만, 나중에는 상대가 악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성화된 사람’의 모습과 상당히 가까운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가까운 접점이 있습니다. 성화를 단순히 ‘죄성이 제거된 상태’라는 형이상학적 설명보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사랑이 형성된 상태’라는 실제 삶의 모습으로 설명할 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까워집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여기에도 끝은 없습니다. 오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제 나는 완전 성화되었다’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안에는 훨씬 더 깊은 자기 사랑의 층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얼마나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나는 사랑이 많은 존재다’라고 자기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압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는 ‘아가페’와 스베덴보리의 천적 사랑을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적(celestial) 사랑은 단순히 인간적 사랑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사랑이 의지 자체의 중심이 되어 선을 행하는 것이 기쁨인 상태와 관련됩니다. 영적(spiritual) 인간은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에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했으니 천적 인간이다’라고 단순히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의가 ‘사랑’을 신앙의 최고 열매로 놓는 방향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아무리 정교해도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생명이 없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삶 속에서 체어리티가 될 때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깊은 주제와도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신앙이 아벨을 죽일 때, 곧 교리가 사랑을 밀어낼 때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문제는 단순히 높은 윤리적 명령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정통 교리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증오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면서 나를 비판한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의 분리입니다. 바로 그 분리를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다시 결합시키십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다른 종교나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 교리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선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어떤 종교적 명칭 아래 있었느냐보다 그가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았으며 선을 사랑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론 거짓은 진리가 아니므로 사후에는 바로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선을 사랑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으면서 악을 사랑한 사람은 그 지식 자체로 천국적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씀은 교리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됩니다. 상대의 오류를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그의 멸망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목적도 상대를 이기는 데 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선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사용하면 진리 자체는 옳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랑은 지옥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 특히 무거운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잘못된 교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 속에 ‘나는 저 사람보다 옳다’는 기쁨이 들어 있다면 proprium이 진리를 이용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가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상처를 주는 칼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악을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결합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왜 그것을 말하는가’가 결합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필요한 진리를 말하되 그 사람을 낮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선을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사랑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쓰임과 선입니다.

 

이 관점에서 ‘원수와 화평한다’는 말도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 갈등하면서도 내적으로 상대의 선을 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의를 막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면서도 그 사람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오류를 강하게 반박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기는 자’의 의미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논쟁에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하면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멸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원수를 없애는 사람이 아니라 원수를 대하면서 자기 안의 미움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폭로하는 데 능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proprium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5강 앞부분에서 강사가 ‘원수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이 자기가 원수’라고 했던 말이 여기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외부의 원수가 사라져도 proprium이 그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다시 원수가 됩니다. 오늘 이 사람과 화해해도 자기 사랑이 그대로라면 내일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렸을 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다루시는 것은 외부의 모든 사람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대하는 내 사랑의 질서를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정만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를 전혀 받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분명히 보면서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진리를 붙들면서도 상대를 멸시하지 않으며, 필요하면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사람이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체어리티의 훨씬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억지로 ‘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해’라고 자기 감정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사랑을 막는 자기 사랑과 보복심을 죄로 여기고 피할 때 조금씩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도 결국 은혜이며 동시에 거듭남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성화’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납니다. 성화를 ‘내 안의 죄성이 100% 제거되었다’는 자기 상태에 대한 선언보다, ‘전에는 미워할 수밖에 없던 사람에게 이제 선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랑의 변화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실제이고, 삶에서 확인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기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를 인정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5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이라고 분별하면서도 그 사람의 실제 선을 원하고, 자기 안의 미움과 보복심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며, 가능한 자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랑이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제 5강은 이러한 성화와 사랑을 실제 인물들의 삶에 더욱 구체적으로 비추기 시작합니다. 특히 강의 후반의 중요한 축인 이용도 목사의 삶과 영적 체험이 점차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1929년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의 승리와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핵심진리’의 틀 안에서 해석합니다. 5강 9부에서는 이 부분을 서둘러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먼저 강의가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충분히 따라간 뒤 ‘내주합일’, ‘그리스도의 생명’, ‘성화’를 스베덴보리의 ‘결합(conjunction)’ 및 주님의 인플럭스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5 9

이용도 목사의 생명내주합일’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5강은 이제 후반부의 중요한 인물인 이용도 목사에게로 들어갑니다. 앞에서 강사는 ‘말씀의 실천-연단-양심의 밝아짐-세 차례 연단-자아의 깨어짐-이기는 자-익은 열매-원수 사랑’이라는 긴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이용도 목사의 삶과 체험을 이 전체 구조의 실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특히 그의 1929년 무렵의 깊은 영적 체험을 세 번째 연단을 통과한 사건으로 보고, 그 이후 나타난 그의 삶과 메시지를 ‘그리스도의 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언어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의의 관심은 단순히 이용도 목사가 얼마나 유명한 부흥사였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깊은 연단을 통과한 뒤 ‘내가 사는 것’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강의가 말하는 ‘생명’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신학적 명제를 알고 있다는 지적 신앙도 아닙니다. 강사가 이용도 목사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내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이 사람 안에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주’라는 말과 ‘합일’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리를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되는 데 있습니다. 진리가 기억에만 있으면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해성으로 들어오고, 의지와 결합하고, 마침내 행동과 쓰임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에서 진리를 ‘사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강의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사이에는 분명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합일’이라는 표현에 들어가면 반드시 하나를 구별해야 합니다. 인간과 주님의 결합이 ‘두 존재가 하나의 존재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과 인간 사이에는 결합(conjunction)이 있지만 존재의 혼합이나 동일화는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며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가장 높은 천국의 천사라 해도 신성 그 자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할수록 자기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생명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내 존재가 그리스도의 존재와 섞여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이해성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점점 더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그 결과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주님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결합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아름다운 역설이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할수록 인간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온전해집니다. 이것은 5강 7부에서 살펴본 ‘자아가 깨어진다’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인격을 부수어 무색무취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인격 자체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타락한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그것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과 쓰임은 오히려 더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과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무수한 천사들이 모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각각의 사랑과 지혜와 쓰임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분열을 만들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하나의 생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한 쓰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상당히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 교리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는 사랑이시다’라고 정확하게 고백하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고, ‘십자가’를 설교하면서 자기 명예를 위해 살 수도 있으며,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위는 결국 생명에서 드러납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뿐 아니라 그 고백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그토록 심각하게 보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의 진리는 선을 향합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하지 않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삶이 될 때 비로소 사람 안에 영적인 것이 형성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과 상당히 가까운 지점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하시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수동적인 도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악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반드시 폭발해야 하고, 탐욕이 생기면 반드시 따라가야 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겉으로 자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자기 욕망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나는 화가 나지만 화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정직을 선택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악으로 갚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 자유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인플럭스 교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비유하자면 눈은 빛을 받아 봅니다. 눈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 사랑하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은 그 유입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그릇이 질서 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주님의 생명이 더 자유롭게 나타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이라는 강한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안전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신성과 인간 본질의 합일’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사이의 결합’입니다. 주님은 주님으로 계시고 인간은 인간으로 있으면서,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추상적인 신비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체험을 평가할 때도 체험 자체보다 그 이후의 열매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렬한 신비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만으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음성을 들었거나 극심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는 영적 진위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와 인간의 교통 가능성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분별한 영적 체험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합니다.

 

영적 체험의 진위를 살피는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그 체험 이후 사람이 자기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해지는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는가, 아니면 섬기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과 선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원수를 더 미워하게 되는가, 아니면 사랑하려 하는가? 체험이 proprium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그 지배를 약하게 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기준은 지금까지 5강이 말해 온 흐름과도 잘 맞습니다. ‘세 번째 연단을 통과했다’는 증거가 어떤 초자연적 현상 그 자체라면 5강 앞부분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계속해서 ‘자기를 본다’, ‘자아가 깨어진다’, ‘작은 일에서 이긴다’, ‘원수를 사랑한다’를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용도 목사의 체험 역시 그 체험 자체보다 그것이 그의 사랑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강의가 보는지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용도 목사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강조가 의미를 갖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그리스도에 관한 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착하게 살아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 생명이 반드시 사랑과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선행은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선행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인간 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외적 열매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행위로 구원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랑이 있으면 행위가 나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이면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열매가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와 오늘날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할 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십자가는 물론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예수께서 내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나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하나의 법정적 공식으로만 축소하면, 그리스도인의 실제 거듭남과 삶이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형벌을 대신 받아 아버지의 진노를 만족시키신 사건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까지 싸우시고 이기시며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영화하신 최후의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 때문에 인간은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거듭남은 서로 경쟁하는 두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영화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이 실제 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과 삶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를 읽으면 상당히 풍성해집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예수의 생명이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이 내 원수 관계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 십자가를 믿는다면 자기부인이 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을 믿는다면 옛사람과 다른 어떤 새로운 생명이 실제로 자라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나치게 주관적인 내적 체험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느낀다’는 확신 자체가 객관적 기준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진리와 선이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은 진리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렬한 사랑과 일치감을 느껴도 그것이 말씀의 선과 진리에 반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며 자기 신격화로 이어진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내주합일’과 ‘신인합일’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제 내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엄청난 영적 위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결합이 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과 주님의 진리를 함부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신적 인플럭스라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언어를 입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결합에는 오히려 겸손이 따라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특별하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성화되었다’가 아니라 ‘내게 있는 선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인식입니다. 천사가 자기 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 말하는 ‘내주합일’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보완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일’의 깊이는 인간이 얼마나 신적인 존재처럼 느껴지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이 얼마나 중심에서 내려오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그의 삶을 움직이는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준으로 이용도 목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의 1929년 체험을 정말 ‘세 번째 연단의 완성’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핵심진리’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을 존중하여 먼저 그대로 이해하되, 스베덴보리의 계시를 근거로 이용도 목사의 사후 영적 상태나 거듭남의 정확한 단계를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의 말과 삶,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랑의 방향을 보여 주는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 절제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판정하는 렌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가르침과 삶 속에 있는 선과 진리를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스베덴보리가 밝힌 영적 질서 안에서 더 정확하게 구별해 보는 렌즈에 가깝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어디에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의 빛이 보이며 어디에서 신학적인 구별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 목사의 ‘생명’ 강조는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교리가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는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앙의 궁극적 증거가 사람의 변화된 사랑과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AC의 아주 근본적인 원리와 만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속한 것은 단순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살아낸 것입니다. 지식은 기억에서 분리될 수 있지만 사랑은 사람의 생명을 이룹니다. 죽음 이후에도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은 그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종교 지식을 축적했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 어떤 사랑의 사람이 되었는가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가장 실제적으로 확인하는 자리는 특별한 체험의 순간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 진실을 말하면 불리해질 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명’이 움직이는지,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지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5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것이 나의 의지와 생각과 행동 안에서 실제 생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내가 그리스도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내주합일’의 가장 안전한 표지는 황홀경도, 환상도, 특별한 계시도 아닙니다. 체어리티입니다. 이전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가, 더 진실할 수 있는가, 더 자유롭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는가, 다른 사람을 덜 멸시하는가, 그리고 모든 선의 근원을 더욱 주님께 돌리는가입니다. 바로 그 열매에서 결합의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5강의 마지막 10부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사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의 전체 강의를 한데 모으겠습니다. ‘핵심진리’가 말하는 ‘연단-죄성-자아의 깨어짐-성화-이기는 자-생명의 내주합일’이라는 큰 구조가 어디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깊이 만나는지, 그리고 ‘죄성의 완전 제거’, ‘전적 부패’, ‘세 차례 연단의 단계화’, ‘신인합일’ 등 어디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한지를 종합하여 5강 전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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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에서 생명까지’ : 5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종합

5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국 한 가지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되는가?’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말씀의 실천’, ‘양심의 빛’, ‘광야의 연단’, ‘세 차례 연단’, ‘죄성’, ‘전적 부패’, ‘자아의 깨어짐’, ‘이기는 자’, ‘익은 열매’, ‘원수 사랑’, 그리고 마지막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내주합일’까지 긴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이 모든 표현은 서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성장론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고, 말씀을 실제로 살면서 자기 안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그것을 회개하며, 자기중심성이 깨어지고, 마침내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되는 상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과정을 ‘익은 열매’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고, 모든 성도가 연단을 받아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원고에서도 ‘연단을 받아야만 익은 열매가 되고,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강한 언어가 반복됩니다.

 

이런 전체 방향을 먼저 충분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5강의 가장 큰 장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신분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당신의 성품과 사랑과 일상에서 무엇을 바꾸었는가?’를 계속 묻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될 때 생명이 없으며, 진리는 선이 되고 행위가 되어야 실제 인간의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5강의 첫 출발점인 ‘말씀의 실천’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습니다. 강사는 말씀을 실천하려 할 때 오히려 자기 안의 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배우면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인내를 배우면 참지 못하는 성질이 드러나며, 자기부인을 배우면 자기 뜻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연단’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이해성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구별되지 않던 선과 악이 구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악을 비추어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연단은 사람에게 새로운 악을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것이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강의에는 반복하여 ‘범죄할 환경이 주어지면 죄성이 발동한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 표현을 ‘삶의 환경 속에서 인간의 숨은 애정과 지배적 사랑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조금 다듬어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시를 당하면 분노가 올라오고, 재물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손해가 생기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나 5강의 ‘연단’과 스베덴보리의 ‘시험’을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진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특정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붙여 주신다는 표현이 상당히 강합니다. 더 나아가 천년왕국 말기에 마귀가 풀리는 것까지 ‘연단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주님의 섭리와 악의 허용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주님은 악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인간과 지옥의 악을 자유 때문에 허용하시되, 그 허용된 악 가운데서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십니다. 따라서 누군가 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주님이 저 사람에게 나를 괴롭히라고 시키셨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이미 발생한 그 사건을 사용하여 내 안의 자기애와 분노를 드러내고 그것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5강의 두 번째 큰 축은 ‘세 차례 연단’입니다.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 광야에서의 아말렉 전쟁, 그리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강적들과의 전쟁을 인간의 영적 성장 세 단계와 연결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도 가나안 정복까지를 ‘세 번째 연단 과정’, 곧 광야 연단의 마지막 단계로 분명히 설명합니다. 이 구조는 ‘신앙생활이 진행될수록 싸움의 대상이 더 깊어진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는 행동의 죄를 다루지만, 점차 인정욕구, 자기 의, 아집, 자기 영성에 대한 자부심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반드시 ‘시험이 점점 적어진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내면이 열리면서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수준의 진리를 배우다가 나중에는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왜 이 말을 하는가? 상대를 살리려는가, 내가 옳음을 증명하려는가?’라는 목적의 차원까지 들어갑니다. 행동에서 의도로, 의도에서 사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모든 사람의 거듭남을 문자 그대로 ‘정확히 세 차례의 큰 연단’으로 공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셋’은 완전한 과정,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상응적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모든 신앙인의 생애에 적용되는 고정된 영적 단계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종류와 깊이와 순서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세 차례’는 영적 성장의 완전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도식으로 받아들이되, ‘나는 지금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를 판정하는 척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5강의 세 번째 큰 축은 ‘죄성’입니다. 강사는 인간이 선을 원하면서도 범죄하는 이유를 ‘영 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힌 죄성’으로 설명하고, 이것을 ‘전적 부패’와 연결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가장 중요한 인간론적 보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유전적 악을 매우 심각하게 말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inmost 자체를 악의 뿌리가 박힌 곳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은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유입되는 가장 내적인 입구와 관계됩니다.

 

또한 조상의 죄책 자체가 법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도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유전되는 것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사람이 자유 가운데 받아들이고 실제 삶으로 만들 때 그것이 그 사람의 악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적 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악한 충동이 스쳤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랑하고 동의하며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인플럭스의 원리가 들어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유입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것이 모두 자기 생각과 자기 애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자유가 있어야 책임과 거듭남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악이 지옥에서 유입된다’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습니다. 유입된 악을 사랑하여 받아들이면 자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공로를 자기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5강의 ‘전적 부패’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의 proprium에서는 참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 가장 가까워집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전혀 없고,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도 사실상 파괴되었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타락한 사람에게도 자유와 합리성을 보존하시며, 어린 시절부터 리메인스를 저장하십니다.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인간 자신의 선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그 안에서 은밀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5강의 죄론은 ‘인간의 악이 얼마나 깊은가’를 매우 강하게 보여 주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다’는 말을 반드시 붙여야 합니다. 인간의 악만 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도 인간 자신이 모르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실제 영적 시험이 가능한 것도 인간에게 오직 악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심어 두신 선과 진리가 그 악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5강의 네 번째 큰 축인 ‘자아의 깨어짐’이 등장합니다. 강사는 자아가 깨어진 사람의 특징을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을 보기보다 자기를 먼저 보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실제 강의에서 목회자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도 어려움을 당하면 차별하지 않고 돕는 사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기보다 자기 안의 사람 의존을 돌아보는 사례 등이 나옵니다. 이 통찰은 proprium의 문제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모든 문제는 내 탓이다’라는 자기비난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가 실제로 악을 행했다면 그 악은 상대의 책임입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을 통해 내 안에서는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살필 수 있는 상태입니다. 상대의 악과 자기 proprium을 함께 구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를 점점 외부에 놓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 교회가 문제다’, ‘저 목사가 문제다’, ‘저 사람이 자아가 강하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언제나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거짓 교리를 비판하면서 자기 안의 자기 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사랑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기 안의 냉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 자체가 proprium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5강의 다섯 번째 큰 축은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입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약속들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청이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또 익은 열매는 말씀을 ‘99%’가 아니라 ‘100%’ 실천하는 사람이며, 빛 가운데 철저하게 회개하여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사람이라고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바로 이 ‘100%’의 언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철저성을 강조하는 목회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유전적 악의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여 절대적 무죄 상태에 도달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와 맞지 않습니다. 천사는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선도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완전함은 ‘나는 이제 자체로 완전하다’는 자립적 완성이 아니라, 주님의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여 그 선이 지배적 사랑이 된 상태입니다.

 

이 차이는 ‘악의 제거’라는 말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이 제거된다는 것은 악이 인간에게서 독립적인 실체처럼 뽑혀 우주 밖으로 사라진다는 뜻이라기보다, 악이 분리되고 억제되어 더 이상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전에는 악을 기뻐해서 행했지만 이제는 그 악을 죄로 여기고 싫어하며 선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제적이고 깊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익은 열매’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아름답게 읽는 방식은 ‘완전히 무결한 사람’보다 ‘주님의 선이 그의 삶에서 실제 열매를 맺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기 공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받아 맺습니다. 인간도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행동과 쓰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진정 익은 사람일수록 ‘내가 이루었다’보다 ‘주님께서 하셨다’는 인식이 깊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의 중간에 등장하는 아주 소박한 일상 사례들이 오히려 ‘익은 열매’의 의미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강사는 자신도 자주 패배한다고 솔직히 말하며, 가정에서 말 한마디와 혈기 하나를 다루는 것을 실제 ‘이김’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기는 자’가 너무 높은 영적 계급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을 생활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큰 신비 체험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말을 절제하는 것, 나를 거스르는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 작은 관계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이김이라는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예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크고 위대한 업적보다 작은 일에서 사랑을 실천한 것을 성화의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종교적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업, 관계, 일상의 책임 안에서 나타납니다. 진리가 자연적 삶의 마지막 행동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선은 머리 안의 선이 아니라 실제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이 원수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5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성화’를 죄성 제거라는 추상적인 설명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선을 원할 수 있는 상태’라는 삶의 모습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신앙의 완성은 결국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만 원수 사랑 역시 무분별한 용납과 같지 않습니다. 악을 악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폭력과 착취와 거짓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언제나 진리와 함께 갑니다. 악을 제지하면서도 상대의 파멸을 즐기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물으면서도 보복심에 지배되지 않으며,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훨씬 현실적인 원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5강이 사랑으로 깊어지는 끝자락에 이용도 목사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수도적인 영성’,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 합일되는 성화·성결의 복음’, ‘그리스도를 온전히 담는 복음’으로 설명하며, 기복신앙과 대조합니다. 이 표현은 5강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결국 죄를 많이 분석하고 연단의 단계를 공부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내주합일’을 결합(conjunction)의 언어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존재론적으로 합쳐져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에 받아들여져 그 사람의 삶을 점점 질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그 생명을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플럭스의 신비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자기 힘으로 생각한다고 느끼지만, 실제 생명은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됩니다. 거듭남은 이 인플럭스가 더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인간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물리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의 가장 깊은 표지는 황홀한 체험보다 사랑과 진리의 열매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용도 목사에 대한 강사의 높은 평가도 절제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는 그의 삶과 체험을 ‘세 번째 연단’, ‘성화’, ‘내주합일’의 틀로 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핵심진리’ 전통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용도 목사의 정확한 영적 단계나 사후 상태를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외적인 전기와 체험만으로 그의 내적인 지배적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기록된 삶과 메시지에서 자기부인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하는 열매가 보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절제는 공용복 선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핵심진리’에 깊은 진리가 많이 보인다고 해서 공용복 선생의 모든 체계가 스베덴보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몇몇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실제 영적 통찰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5강은 바로 그 균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삶으로 살아야 한다’, ‘자기 안의 악과 싸워야 한다’, ‘자기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넓혀야 한다’, ‘신앙은 실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깊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의 가장 깊은 곳에 죄성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한 세 차례 연단을 통과한다’, ‘100% 정결한 익은 열매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 문자적인 종말론적 시간표 등을 절대적인 영적 구조로 만드는 부분은 중요한 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종말론의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강의의 전체 성장론은 교회시대, 휴거, 대환란, 천년왕국 같은 문자적인 미래 시간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 자료에서는 일부 성도의 환난 전 휴거, 후 3년 반 등의 구조를 문자적인 종말 사건으로 설명하고, 천년왕국의 사람들까지 실제 역사적 인구 집단으로 다룹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런 이미지들을 교회의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는 상응적 말씀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체계가 분명히 갈라집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지적하는 목적은 ‘누가 더 성경적인가’를 놓고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각각의 말이 사람의 영적 삶에 무엇을 하려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핵심진리’의 종말론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정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긴장을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은 그 긴장을 미래의 달력에서 현재의 내적 상태로 가져옵니다. ‘언젠가 대환란이 올 때 준비되어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근원적으로 ‘오늘 당신 안에서 무엇이 주인인가?’를 묻게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5강을 읽으면 종말의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집니다. 마지막 심판이 먼 미래의 공포스러운 사건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거짓의 외관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질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영계에 들어가면 자기가 지상에서 형성한 사랑의 상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5강 전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강의는 그것을 ‘죄성과 정욕을 이기고 있는가’라고 묻고, ‘자아가 깨어졌는가’라고 묻고, ‘익은 열매인가’라고 묻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었는가’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같은 질문을 ‘당신의 지배적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갑니다. 돈을 가장 사랑하면 진리조차 돈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자기 명예를 가장 사랑하면 종교조차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중심이 되면 돈과 지위와 지식과 재능은 모두 쓰임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이 주인인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자’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이기는 자는 강한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정복한 영적 영웅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점점 생명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여전히 자연적 욕구와 감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서 질서를 찾습니다.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개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삶의 최종 중심으로 삼는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충실히 행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도 상대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막되 미워하지 않는 것, 진리를 말하되 멸시하지 않는 것, 거리를 두어야 할 때 거리를 두면서도 그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진리가 결합된 체어리티입니다.

 

‘내주합일’도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소유처럼 독립적으로 갖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면서, 그 사랑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 실제 삶으로 표현하는 결합입니다.

 

그리고 ‘익은 열매’ 역시 자기 완성의 자격증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자연적 삶의 실제 열매까지 내려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익은 열매는 말로 자기 익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 삶에서 나타납니다. 말투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5강이 이용도 목사의 ‘생명’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긴 죄론과 연단론의 마지막 목적이 ‘죄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진리를 배우는 것도 결국 그 진리가 선한 삶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에서는 ‘핵심진리’의 5강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이 아주 아름답게 만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신앙에서 행하는 신앙으로, 행하는 신앙에서 사랑하여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말씀 때문에 참습니다.’ 나중에는 ‘상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참습니다.’ 더 깊어지면 ‘그 사람의 선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AC에서 읽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신앙은 필요합니다.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독립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면 ‘가인’이 됩니다. 반대로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삶을 섬기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5강이 그토록 ‘말씀을 실제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결국 이 문제와 만납니다.

 

그래서 저는 5강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연단을 많이 받아 자기 힘으로 완전한 존재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실제 삶에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주님의 힘으로 죄로 알고 물리치고,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가 점점 생명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여기에 던지는 아주 좋은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겨 두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말씀은 지금 당신의 생활에서 실제로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AC를 읽는 사람에게도 매우 필요한 질문입니다. 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과 퍼셉션과 인플럭스와 proprium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과, 그것들이 실제 우리의 말과 관계와 선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핵심진리’에 되돌려 줄 수 있는 질문도 있습니다. ‘그 연단과 성화의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생명을 주시고 악을 물리치시는 분이 누구이며, 인간의 자연적 애정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어떻게 회복하시는가?’입니다. 이 질문이 들어가면 성화는 자기완성의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도 삶의 변화라는 엄중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게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5강의 장점은 더욱 살아나고, 지나치게 단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보완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욕망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격과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없는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이 신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국 한 곳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진리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5강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가장 깊고도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5강은 10부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1부의 ‘말씀의 실천과 양심의 빛’에서 시작하여, 2부의 ‘출애굽-광야-가나안’, 3부의 ‘세 차례 연단’, 4부의 ‘죄성과 전적 부패’, 5부의 ‘이기는 자와 익은 열매’, 6부의 ‘작은 일의 승리’, 7부의 ‘자아가 깨어짐’, 8부의 ‘원수 사랑과 체어리티’, 9부의 ‘이용도 목사와 생명의 내주합일’을 지나, 마지막 10부에서는 그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실제 삶이 되는 거듭남’이라는 한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앞선 1강부터 이번 5강까지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핵심진리’의 가장 강한 문제의식도 이제 꽤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무엇을 알고 믿는가’에서 멈추지 말고 ‘그 진리가 실제 당신의 생명이 되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질문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오래 붙들어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Y.57,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4강 (7/28),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죄론’의 문을 열다 : 죄를 행위가 아니라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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