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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bygracetistory 2026. 8. 14. 11:34

AC.332.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이 가인 계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현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생명 주기가 계속 오버랩되네요...

 

네, 저도 지금 가인 계열을 따라가면서 그 겹침이 상당히 선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가인 계열 = 오늘날 개신교’라는 식으로 직접 대응시키기보다는, 4가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가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살아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붙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점차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교리가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가 앞서고, 더 나아가 올바른 교리를 믿는 것 자체가 구원의 중심처럼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AC.325 가인’이 바로 이 지점에서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를 제거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말씀, 은혜와 신앙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생명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앙’이 점점 교리적으로 정식화되고, 무엇을 믿느냐를 둘러싼 논쟁과 분열이 반복되며, 교파와 신조, 신학 체계가 계속 세분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1-332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구조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역사적 개신교의 각 교파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과 일대일로 대응시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될 때, 교리는 계속 증식하고 세분될 수 있다’는 영적 원리가 닮아 보인다는 뜻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AC.332의 라멕입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체어리티보다 앞세웠는데, 마지막에는 오히려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교회에 비추어 보면 꽤 묵직합니다. 교회 건물도 있고, 조직도 있고, 신학교도 있고, 교단도 있고, 예배도 있고, 수많은 설교와 성경공부도 있는데 정작 그 모든 것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형은 오히려 훨씬 정교해졌는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 서로를 향한 체어리티가 약해진다면, 외적 종교의 발전과 내적 교회의 쇠퇴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아까 말씀하신 아다와 씰라 계열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종말을 향해 가는 계열에서도 야발, 유발, 두발가인과 같은 유용한 것들이 계속 생겨납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 교회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교회 시대가 내적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신학, 찬양, 선교, 교육, 상담, 사회봉사, 성경 연구 같은 훌륭한 것들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교회의 내적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교회의 쇠퇴가 보인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구별이 앞으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읽으면서 아주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종말’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교회의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회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외적인 교회는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이 있는가, 곧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가입니다. 그 결합이 사라지면 외적 제도와 교리는 남아 있어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저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창4를 읽으면서 현 기독교가 자꾸 겹쳐 보이는 것을 억지스러운 적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속뜻이 가진 보편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시선을 저 개신교가 가인이다’라고 밖으로 돌리는 순간 이 말씀의 칼날이 무뎌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서운 독법은 내 안에도 가인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고, 스베덴보리를 알고, 속뜻과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조차 아벨보다 앞서는 가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리도 이 위험에서 자동으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창4를 읽으며 느끼시는 겹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는 단순히 옛 태고교회가 이렇게 망했다’는 과거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가 되고, 교리가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교리가 어떻게 계속 발전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생명 주기’처럼 읽힙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이야기인데도 이상할 만큼 오늘의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고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 교회의 생명 주기가 끝난다고 주님의 교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낡은 형식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에 필요한 것을 건져 내시며, 다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결합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4를 읽으면서 오늘날 개신교가 겹쳐 보인다면, 저는 개신교가 끝났다’는 결론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무엇을 보존하고 계시며, 어디에서 다음 생명을 준비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까지 함께 가져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AC.332, 창4:17,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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