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335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이 상징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이 신앙을 ‘셋’(Seth)이라 합니다. (25절)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324-334가 주로 ‘가인’으로 시작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변질되어 갔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제 AC.335부터는 그 종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새로운 길을 마련하셨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번호를 ‘이 주제의 요약이 제시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바로 ‘셋’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새로운 신앙’입니다.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핵심은 신앙 자체에 있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앞세운 신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중요한 것으로 높였고,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결국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 자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 있는 신앙이며, 더 정확하게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신앙이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느냐에 있습니다.
원문의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의 목적이 신앙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신앙은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종착지가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바로 이 질서를 뒤집어 신앙 자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를 그 아래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태고교회 최초의 천적 인간에게는 본래 이러한 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하여 선을 행하였고, 그 선 안에서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곧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가 타락하면서 이 천적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것은 최초의 태고교회 상태로 단순히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전의 퍼셉션을 잃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의 달라진 상태에 맞는 새로운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335는 우리가 앞서 ‘가인의 표’를 다루면서 제기했던 질문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가인의 신앙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표’를 주어 보존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AC.330에서 그 이유는 ‘후에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에서 바로 그 일이 나타납니다. 가인적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길을 보존하셨기 때문에, 이제 ‘셋’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인의 표’와 AC.335의 ‘셋’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섭리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라멕을 다루면서 가졌던 의문에도 답을 줍니다. 라멕에게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면,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던 주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AC.335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특정한 교리적 계열에서는 신앙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향한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는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이 ‘셋’으로 상징되는 신앙입니다.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 질서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창4의 ‘셋’을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가인이 태어나고, 가인의 여러 후손이 이어진 뒤, 라멕과 그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가 다시 셋을 낳는 것처럼 서술됩니다. 그렇게만 읽으면 가인 계열의 여러 세대가 모두 지나간 뒤에야 셋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AC.335의 셋은 단순히 ‘가인 계열이 끝난 뒤 역사적으로 등장한 한 사람’이라는 시간순의 의미보다, 가인으로 상징되는 분리된 신앙과 구별되는 새로운 신앙의 계열이 주님에 의해 세워졌다는 데 중심이 있습니다.
특히 창4:25에서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므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 대신에 다른 씨’로 주어진 셋은 단순히 죽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또 하나의 아들이 아닙니다. 속뜻으로 보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이후, 주님께서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마련하신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래서 ‘셋’이라는 이름 자체가 교회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여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섭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억지로 과거로 돌려놓지 않으십니다. 최초의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상태가 이미 상실되었다면, 그 상태를 강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상태는 낮아졌지만,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 낮아진 상태에 맞추어 계속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적응과 섭리의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셋’이 곧 홍수 이후 ‘노아’로 시작되는 영적 교회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 시대 안에 있으며, 태고교회의 남은 계열 가운데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후 창5에서 셋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 역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다가 결국 홍수라는 종말에 이릅니다. 그 후에야 ‘노아’로 의미되는 고대교회가 일어나며, 그때에는 퍼셉션 대신 양심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과 ‘노아의 새로운 교회’를 구별하면서 읽어야 창4와 창5, 그리고 창6 이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분명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높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많이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이미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려진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어떤 것인지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확신 있게 고백하는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지, 악을 악으로 알고 피하게 하는지, 자기 자신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게 하는지, 삶을 선으로 이끄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과 셋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이지만 내적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가인의 신앙은 ‘신앙을 위하여 체어리티를 희생시키는 신앙’이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종속되지만, 후자에서는 신앙이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수단이 됩니다. 신앙이 자신을 높이면 가인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면 셋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이고, 셋은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가인인가, 셋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신앙의 증거로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과 교리가 나의 사랑과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신앙이 나를 다른 사람보다 옳은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가, 아니면 더욱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는가? 바로 이런 질문 앞에서 가인과 셋은 과거의 두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안에서도 갈라지는 두 종류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 AC.334에서 우리가 오래 붙들었던 문장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어느 쪽이든 진리가 자기 입장을 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신앙은 결국 진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기 위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셋의 신앙은 진리가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끌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진리를 이용하여 자신을 세우는 신앙과, 진리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5는 가인 계열의 어두운 이야기를 지나온 뒤 처음으로 매우 분명한 회복의 빛을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체어리티를 향한 주님의 뜻은 죽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무너진 자리에서도 인간의 현재 상태에 맞는 새로운 길을 마련하여 다시 선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셋’은 바로 그 회복의 길을 의미하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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