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엇을 믿는지 분명하게 고백하고 올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은 오히려 신앙생활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이 교리의 왜곡이었고, 심지어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신앙고백 역시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37 자체가 그 답을 줍니다. 태고교회와 오늘날 인간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인간이었고, 사랑으로부터 주님께 받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하며, 지금은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고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에게 사랑과 신앙은 아직 분리된 두 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참된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고,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 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를 깊이 사랑할 때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과 ‘나는 내 아이가 소중하다고 믿는다’를 두 개의 별도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알고 있으며, 그 앎이 사랑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질서가 달라집니다. 원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앎을 사랑에서 떼어 내어 독립시킨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이보다 훨씬 깊은 영적 차원에서 그러한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가인의 시작도 ‘사랑을 버리자’는 노골적인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세우는 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도 온전한 신앙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는 신앙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있으면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4에서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가인 계열의 진행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였지만,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에게 신앙을 따로 배우고 고백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AC.337은 이 점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은 후대 인간에게 필요한 과정입니다.
여기서 ‘신앙이 앞선다’는 것은 ‘신앙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끌기 위해 주어지고,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인간 안에 선을 형성하실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신앙고백이 가인적으로 되는 지점은 신앙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할 때입니다. 교리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이 삶에서의 선을 대신하고, 올바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피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약화시킨다면 가인의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확한 교리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악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신앙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악이었다’는 말을 오늘날 모든 신앙고백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때’라고 한 것을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이 퍼셉션 안에서 하나였던 천적 교회에서는 그것을 처음 분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가 어떻게 달리 적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과 후대의 영적 인간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를 관통하는 목적은 같습니다. 진리와 선이 결합되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37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어디로 나를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그 신앙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자신만을 높인다면 태고교회의 가인에게서 나타난 영적 위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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