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AC.337 심화
2. 가인의 분리를 이해하는 부부의 비유
가인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다는 말을 처음 들으면 이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문제였는지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믿는지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AC.337의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부로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여깁니다. 그렇다고 매일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펼쳐 놓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이미 서로를 향한 사랑 안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규칙이나 원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원칙들이 사랑 안에 살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신실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을 피합니다. 규칙의 내용이 사랑 밖에서 억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관계도 이와 어느 정도 비슷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에 속한 것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사랑과 별개로 신앙을 따로 떼어 내어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라고 독립된 체계로 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신앙을 따로 언급하는 것조차 꺼렸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은 바로 이 하나 된 질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제 서로의 마음과 유익보다 조항을 먼저 살피고, ‘나는 20개 가운데 19개를 지켰으니 좋은 남편이다’, ‘당신은 14번을 어겼으니 나쁜 아내다’라고 서로를 평가합니다.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이 규칙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본래 관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사랑에서 나온 원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하고, 마침내 사랑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가인의 시작도 이와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본래 사랑 안에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면서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창4의 흐름은 이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분리된 신앙의 예배가 생기며,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며, 마지막에는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규칙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관계의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이미 많이 식어 버린 부부에게는 오히려 ‘서로 모욕하지 말자’,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자’, ‘어려울 때 서로 돕자’ 같은 원칙을 다시 배우고 의식적으로 지키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멈추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가운데 관계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사랑 자체를 단순한 규칙 준수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상태가 달라지면 원칙과 사랑의 관계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AC.337의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는 가인의 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독립된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부간 준수 사항’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 교리와 신앙고백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살아 있을 때 원칙은 그 사랑을 표현하고 지키는 형식이 될 수 있으며, 사랑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올바른 원칙이 다시 관계의 질서를 배우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준수 사항이 사랑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교리가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이것만 정확히 믿으면 된다’는 것으로 바뀌면 진리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부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핵심은 ‘규칙이냐 사랑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질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살아 있었고,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이끄십니다. 어느 경우에도 최종 목적은 규칙이나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홀로 서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리는 바로 이 결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신앙을 가진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생명인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낸 데 있습니다. 이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에서 그 분리를 ‘엄청난 악’이라고 했는지를 조금 더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AC.337 심화 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AC.337 심화3. 시72:1, 3, 5, 7은 왜 인용되었는가?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
bygrace.kr
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 심화 1. 왜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을 따로 고백하는 것’조차 엄청난 악이었을까? AC.337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