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7, 심화 3, ‘시72:1, 3, 5,7’
AC.337.심화
3. ‘시72:1, 3, 5,7’
1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3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5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시72:1, 3, 5, 7) Give the king thy judgments, and thy righteousness to the king’s son. The mountains shall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the hills in righteousness. They shall fear thee with the sun, and toward the faces of the moon, generation of generations.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be no moon. (Ps. 72:1, 3, 5, 7)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시72:1, 3, 5, 7을 인용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인’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분리가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337 첫머리에서 참된 교회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인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시72를 통하여 천적 인간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시편에서 핵심은 ‘해’, ‘달’, ‘산들’, ‘작은 산들’, 그리고 ‘평강’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해’가 사랑을, ‘달’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이 인용의 중심입니다. 해는 스스로 빛을 내지만, 달은 해의 빛을 받아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태고교회에서 신앙은 사랑과 독립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생명과 빛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주님을 사랑했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놓인 또 하나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72의 해와 달은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해와 달이 존재하는 오랜 세월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속뜻으로 보면 사랑과 신앙이라는 교회의 두 핵심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독립된 두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가 중심입니다. 곧 사랑이 중심이고, ‘달’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 나타나기 전 참된 교회의 질서입니다.
‘산들’과 ‘작은 산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말씀에서 높은 곳, 특히 산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의로 말미암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천적 교회의 중심이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에서 ‘평강’이 흘러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평강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내적 평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는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달이 다할 때까지’라고 한 이유를 놀랍게도 ‘신앙이 사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져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이 사랑과 완전히 결합되어 더 이상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믿는다’고 하던 것이 마침내 ‘나는 이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는 생명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바로 사30:26의 ‘달빛은 햇빛 같겠고’라는 말씀까지 연결합니다. 달이 상징하는 신앙의 빛이 해가 상징하는 사랑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72와 사30은 같은 천적 질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의 최종 목적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지 않고,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 구절이 ‘가인’을 설명하는 AC.337에 필요한지가 선명해집니다. ‘가인’은 바로 이 질서를 깨뜨렸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해와 달, 곧 사랑과 신앙이 하나의 질서 안에 있었는데, 가인으로 불린 사람들은 ‘달’을 ‘해’에서 떼어 내듯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습니다. 더 나아가 분리된 신앙을 그 자체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교리 하나를 새로 주장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태고교회를 교회답게 하던 가장 근본적인 질서, 곧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온다’는 질서를 뒤집은 데 있었습니다.
이것을 앞서 살펴본 부부의 비유와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존중하던 부부가 어느 순간부터 사랑 자체보다 ‘부부간 준수 사항 20가지’를 따로 떼어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준수 사항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던 것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시72는 바로 그 분리가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하나였던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generation of generations’, 곧 ‘대대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홍수 이후의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시72의 인용은 태고교회만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사라진 이후에도 주님의 목적은 여전히 같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져 이제는 먼저 신앙을 배우고 그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질서가 필요해졌지만, 최종 목적은 여전히 신앙과 사랑의 결합입니다. 길은 달라졌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목적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AC.337의 시72 인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시72의 해와 달, 산들과 평강을 통하여 태고교회에서 사랑과 신앙이 본래 하나였던 천적 질서를 먼저 보여 줍니다.’ 그래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일이 왜 당시에는 그토록 엄청난 악으로 여겨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인용의 중심은 ‘해와 달’입니다. ‘해’인 사랑이 먼저이고, ‘달’인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을 받습니다. 그리고 완성에서는 달이 해와 하나가 되듯 신앙이 사랑과 하나가 됩니다. ‘가인’은 바로 이 둘을 갈라놓은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시72는 단순히 천적 인간을 아름답게 묘사하기 위해 덧붙인 인용이 아니라, ‘가인의 분리’가 무엇을 깨뜨렸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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