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스베덴보리의 렌즈

SY.65, 강문호 목사, ‘이영길 수도사’ (20191210)

bygracetistory 2026. 8. 17. 09:12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이영길 수도사’라는 한 인물을 통해 수도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님은 전남 화순의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홀로 수도하던 이영길 수도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에게 함께 수도하며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영길 수도사는 ‘수도가 완성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수도의 완성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음란의 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눈물이 나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강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수도사의 영성’으로 높이 평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영길 수도사가 오랫동안 여성을 전혀 만나지 않고 살아왔음에도 ‘아직 내 속에서 음란의 영이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했다는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외적 환경과 내적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음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의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그 욕망 자체가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악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기보다 사람의 내적 사랑과 애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들어가 외적인 자극을 차단했다고 해서 내적인 악이 자동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십 년 넘게 여자를 보지 않았는데도 아직 내 안에 음란이 남아 있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기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음란의 영이 완전히 빠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표현을 조금 다르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욕망은 어떤 외적 영이 몸속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악한 애정에는 지옥의 영들이 인플럭스를 주지만, 그들이 사람 안에 어떤 독립된 실체로 ‘들어앉아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어떤 악을 즐거워할 때, 그 악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적 공동체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 악을 죄로 인식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거절하기 시작하면 그 연결이 약해지고, 선한 영들과 천국의 인플럭스를 더 자유롭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음란의 영을 빼내는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음란한 욕망을 죄로 인정하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사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단순한 억압과도 다릅니다. 어떤 욕망이 떠오르지 않도록 환경을 차단하는 것과 그 욕망 자체가 변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사람은 수도원에 들어가 외적 유혹을 거의 경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악이 내면에 그대로 잠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그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질서에 반한다’고 인식하고 자유롭게 거절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그 악의 즐거움 자체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이 실제적인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영길 수도사의 고백에서 귀하게 볼 부분은 ‘나는 이미 수도자가 되었으니 순결하다’고 스스로 완성된 사람처럼 여기지 않고, 오랜 수도생활 후에도 자기 안의 남은 악을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완전히 없어져야 수도가 완성된다’는 생각에는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거듭남은 이 세상에서 한순간에 끝나는 완제품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거듭나며, 천국에 들어간 뒤에도 영원히 더 완전한 선과 지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어느 날 ‘이제 내 안에는 음란도 없고 자기 사랑도 없고 모든 악이 사라졌으니 수도가 완성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종착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proprium이 남아 있는지를 더 섬세하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성숙은 ‘나는 완성되었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나는 아무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식의 깊어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기준으로 제시된 것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이영길 수도사는 자신이 본래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고, 그렇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때가 수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이러한 십자가 사랑과 감사 자체는 귀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와 주님의 구원을 깊이 느끼면서 마음이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눈물이 난다는 현상 자체를 영적 완성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감정의 강도와 영적 상태의 깊이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 쉽게 눈물을 흘리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분노와 지배욕과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오랫동안 악을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감정 표현의 강도가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과 실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십자가를 생각한 결과 내가 악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는가?’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셔야 하는데 그 형벌을 예수님께 대신 내리셨다’는 단순한 형벌 대속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 전체와 마지막으로 싸우시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신 가장 큰 시험이었으며, 동시에 당신의 인성을 완전히 신성하게 하신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다는 것은 ‘내가 받을 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감격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악과 지옥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어떤 싸움을 치르셨는지를 바라보고, 우리 역시 주님의 힘으로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영상 중 강 목사님은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수정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법적 죄책으로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그 죄 때문에 정죄된다는 전통적인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 곧 유전악입니다. 사람은 조상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자유롭게 악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때 그 악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유죄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는 다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아담이 저지른 죄의 형벌을 내가 대신 뒤집어쓴 것’으로 이해하면 구원도 그 법적 형벌을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는 구조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실제적인 악의 사랑과 그로 인해 뒤틀린 삶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 역시 단순히 죄책의 장부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악의 권세에서 실제로 건져 내어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역시 죄책감과 눈물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사랑의 질서가 실제로 바뀌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영상에서 이영길 수도사가 산속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 놓고 ‘내가 죽으면 여기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세상의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수도 전통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이 영성의 목적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영계에서의 삶으로 넘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언제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가지고 갈 사랑은 지금 무엇인가?’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재산과 지위와 육체를 모두 남겨 두고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돈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을 가지고 가고, 지배를 사랑했다면 그 욕망을 가지고 가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했다면 그 사랑 역시 가지고 갑니다. 그러므로 무덤을 파 놓고 바라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죽음의 준비는 매일 자기 안의 악한 사랑을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은 결국 ‘지금 내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강 목사님은 이영길 수도사의 모습을 ‘사람 같지 않은 수도사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큰 감동을 표현합니다. 깊은 산속에서 휴대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곳에 십 년 넘게 홀로 머물고, 여성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무덤까지 준비해 놓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삶은 분명 현대인의 눈에는 놀랍게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외적 극단성에 대한 감탄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버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모두 버려도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수도자’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자기 생각을 사랑할 수 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도 자기 우월감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덤을 파 놓고 죽음을 묵상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알고, 자기 이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금욕의 양은 영성의 높이를 측정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영길 수도사의 수도생활을 낮추어 볼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영상에서 아름답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수도했음에도 아직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고백했다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 고백이 진실했다면, 그것은 자기 완성을 과시하는 말보다 훨씬 수도적입니다. 십 년을 수행한 뒤에도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살피는 태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신에게 있는 선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더 많이 보고, 자기 의보다 자신의 proprium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더 깊이 보게 됩니다.

 

다만 이 영상 전체에서 수도의 완성이 ‘음란의 욕망이 완전히 없어지고,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 상태’로 압축되는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존재 전체에 관한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음란도 중요한 악이지만, 교만, 지배욕, 자기 공로, 복수심, 탐욕, 거짓, 타인을 업신여기는 마음 등도 모두 거듭남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적 욕망에서는 매우 자유로워졌어도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강하다면 아직 깊은 거듭남의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눈물은 거의 없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매우 깊은 영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의 완성’은 특정 욕망 하나가 사라지거나 특정 감정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상태라기보다,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이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는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완전한 종착점이 없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도 천사들은 완성된 채 멈춰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랑과 지혜에서 자라갑니다.

 

이 영상은 수도가 단순한 외적 형식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싸우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깊은 산속에 십 년 넘게 홀로 살았어도 자기 안의 음란을 문제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에도 같은 사람인가? 외적 환경이 바뀌었을 뿐인데 그것을 내적 변화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악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마지막에 다시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수도의 목적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벽한 수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악을 죄로 인식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거절하되, 실제로 악을 이길 힘과 선을 행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자기 자신을 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하시도록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말하는 ‘수도의 완성’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으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의 완성은 어떤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거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특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점점 더 정직하게 보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자기 사랑이 차지하던 자리에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점점 더 들어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영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기억할 만한 장면은 어쩌면 깊은 산속 생활이나 미리 파 놓은 무덤보다 ‘십 년 넘게 수도했지만, 아직 내 안에 이것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된 영성은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보다, ‘주님, 제 안에는 아직도 주님께서 고쳐 주셔야 할 것이 이렇게 많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더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SY.50, 강문호 목사, ‘이스라엘 첫 수도원, 채리톤’ (20191208)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