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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bygracetistory 2026. 8. 17. 11:46

AC.338.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작은 변화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 분리는 점점 깊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처음 그런 움직임이 나타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작은 싹에 불과했을 때 그 방향을 돌려놓으셨다면 그렇게 심각한 결과까지 가지 않았을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주님의 섭리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막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유 가운데서만 사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생각과 의지를 직접 통제하여 사랑에서 벗어나는 생각 자체가 생길 수 없도록 하셨다면, 겉으로는 태고교회의 아름다운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지되는 사랑은 더 이상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어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행동을 강제로 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강제로 이웃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간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하는 인간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허용’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한, 그 자유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과 함께 그것을 거절할 가능성도 따라옵니다. 만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 자체가 없다면 자유도 실제적인 자유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유 가운데 잘못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허용’과 ‘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떠나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향할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호하시며, 그 사람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허용은 무관심한 허용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면서도 가능한 한 생명 쪽으로 이끄시는 섭리 안에서의 허용입니다.

 

실제로 창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4:7)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된 방향을 알고 계셨고, 그가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신앙을 버려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선과 체어리티에 연결하라’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에서도 마지막 선택을 가인에게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려 할 때 그의 의지를 강제로 정지시키거나,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마음을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양심을 통하여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속뜻으로 보면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를 주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잘못된 상태에 있는 가인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처음 읽을 때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AC.330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훗날 바로 신앙으로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다른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현된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는 버리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랑에서 떼어 낸 신앙을 주님께서는 훗날 다시 체어리티와 연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 안에서도 다음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창3부터 계속 나타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떨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으시고,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생명나무에 함부로 접근하여 더 깊은 모독에 빠지지 않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길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창4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을 때에도 신앙 자체를 없애지 않고 보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교회의 옛 질서가 마침내 유지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인간은 계속 주님의 질서를 무너뜨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면서 남아 있는 것을 붙드시고 다음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왜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주님께서는 인간을 애초에 잘못 선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 대답은 ‘사랑’에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사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선을 선택하는 자유만 남겨 두는 것은 실제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되, 그 자유가 파멸로 향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안에서 역사하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이 점에서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적극적인 개입’보다 훨씬 더 깊고 섬세합니다. 눈앞에서 기적을 일으켜 잘못된 길을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큰 섭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신의 자유와 이성으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안에서 선한 애정을 일으키고 진리를 만나게 하며, 악의 결과를 통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다시 돌아설 기회를 마련하며, 심지어 잘못된 선택 이후에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에게는 때로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러한 인도가 오히려 섭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초신자의 눈으로 ‘주님께서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면 안 되었을까?’라고 묻는 것은 매우 좋은 질문입니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게 자유롭게 사랑하고 선택할 수 없게 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을 보여 주시고, 경고하시고, 억제하시고,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으며, 인간이 끝내 잘못 선택했을 때조차 그 실패 속에서 구원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결국 ‘방치’와 ‘섭리’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가인이 될 자유까지 빼앗아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가인이 다시 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도 끝까지 닫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길을 거절했을 때조차 다음 회복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넘어지지 않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생명을 향해 일어설 수 있는 길을 끝까지 마련하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분리를 허용하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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