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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bygracetistory 2026. 8. 18. 15:3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 그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 “I have gotten a man, Jehovah” 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 “Cain” 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 “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에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 “I have gotten a man, Jehovah,” or “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나온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라는 표현을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특히 이 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내용은 원래 태고교회 안에 이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알았는가’보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거나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들의 사랑과 생명 안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이것이 신앙이다’라고 정의하거나 하나의 교리 체계로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부모를 깊이 사랑하며 평생 살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먼저 ‘부모 사랑의 원칙’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여 부모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돌보며, 사랑하기 때문에 어려울 때 돕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항목별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오히려 잠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모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지식으로 정리하기 전에 이미 삶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신앙을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이전에는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구별하고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합니다. 전에는 사랑 안에서 하나로 살아 있던 것들을 이제는 대상으로 삼아 ‘이것은 신앙에 속한 것이다’, ‘저것도 신앙에 속한 것이다’라고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리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곧 악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변화를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 AC.340 전체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중요한 문장은 많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 속에 많은 진리를 저장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들의 사랑과 삶 안에 있었고,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진리를 사랑에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살아서 알던 것’이 점차 ‘배워서 아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진리의 내용 자체가 갑자기 거짓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 존재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AC.338에서 살펴본 ‘가인의 분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었고,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면서, 신앙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이제 밖으로 꺼내어 이름을 붙이고 교리로 정리한 것입니다. 바로 이 새로운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신앙’이라는 뜻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변화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이제 지식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진리를 대상으로 삼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퍼셉션했는데, 이제는 교리를 통하여 무엇이 참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앙에 관한 지식과 체계가 생겨났으니 무엇인가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태고교회 특유의 퍼셉션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AC.340을 근거로 ‘교리나 지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고, 그 신앙으로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이해하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분별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고, 그 진리가 곧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으로 나타나는 변화에서는 신앙을 사랑에서 떼어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먼저 신앙의 진리를 배우되, 그것이 체어리티로 이어지고 마침내 삶에 새겨져야 합니다.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면, 오늘날 우리의 거듭남은 ‘지식으로 배운 진리가 다시 마음과 삶에 새겨지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AC.340 후반에서 스베덴보리가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를 차례로 예로 드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에는 그 사람이나 대상과 관련된 어떤 성질과 상태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사실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과 연결되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르우벤과 연결되며, ‘이번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이 유다라는 이름과 연결됩니다. 같은 방식으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그 이름으로 나타낸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도 단순히 한 여인이 아이를 낳고 기뻐하며 한 말로 읽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앞서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4의 잉태와 출생과 이름과 계보는 태고교회 안에서 교리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서로에게서 파생되었는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이전까지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정리하여 ‘우리가 이것을 얻었다’고 여긴 상태를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면서 큰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한 가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알게 된 이 진리가 내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입니다. 지식이 늘어나는 것과 생명이 깊어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더욱 실제적일 수 있습니다.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인플럭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개념을 점점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게 되어도, 그것 자체가 곧 거듭남은 아닙니다. 그 진리로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머리로 배운 진리가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40은 ‘진리를 얼마나 많이 발견했는가?’만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진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마음에 새겨져 생명으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으로만 남아 있는가? 교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교리가 사랑에서 떨어져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이 되어 있는가? 가인의 시작은 처음부터 명백한 거짓을 믿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참된 것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별도로 소유하기 시작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AC.340의 핵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미세한 변화 속에 이후 가인의 계열에서 점점 더 분명하게 나타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이미 씨앗처럼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40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 글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하는 방식 자체를 돌아보게 합니다. 진리는 많이 알고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이 되기 위한 것이며, 교리는 사랑을 대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길은 머리로 배운 진리가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점차 마음과 삶에 새겨져, 마침내 우리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16:11

 

 

AC.340, 심화 1, ‘창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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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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