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0, 심화 4, ‘창29:35’
AC.340.심화
4. ‘창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창29:35)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9:35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를 인용한 이유도 앞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을 인용한 이유와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일이 생기거나 새로운 상태가 나타났을 때, 그 성질을 이름에 담아 표현했으며,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를 통해 창4의 ‘가인’이라는 이름 역시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창29:35에서는 이름과 그 이름을 붙인 이유가 본문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낳은 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유다’라고 합니다.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 ‘감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유다’라는 이름에는 단순히 넷째 아들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그때 레아에게 있었던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개역개정의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라는 표현은 AC.340에서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원리를 아주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어떤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하며, ‘이로 말미암아’ 그에 맞는 이름을 붙입니다. 따라서 이름은 그 상태와 아무 관계 없이 임의로 정한 표지가 아니라, 그 상태를 한 이름 안에 담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원리를 ‘가인’에게 적용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본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신앙의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고 얻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 상태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표현했고, 그렇게 나타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와 가인이 나타내는 영적 의미가 같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다의 속뜻을 가인의 속뜻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레아에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있었고, 그 상태를 담아 ‘유다’라고 한 것처럼, 태고교회 안에서도 신앙을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얻었다고 여기는 상태가 생겼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곧 ‘가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AC.340에서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를 연이어 제시한 의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스마엘’에는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르우벤’에는 ‘여호와께서 보셨다’는 것이, ‘시므온’에는 다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는 것이,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것이 각각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거듭 제시하면서, 말씀의 이름을 오늘날의 단순한 고유명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특히 유다의 사례는 ‘가인’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를 더욱 선명하게 해 줍니다. 이름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의 성질을 이름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가인’이라는 이름을 만났을 때도 먼저 ‘가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왜 이것을 가인이라고 했는가?’, ‘이 이름에는 어떤 상태가 담겨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39에서 설명한 태고인들의 계보 작성 방식과도 이어집니다. 태고인들은 교회에 속한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그것들의 성질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생겨나는 관계를 잉태와 출생과 자손과 계보의 형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따라서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는 기록도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신앙의 교리가 생겨난 것을 나타내며, ‘가인’이라는 이름은 바로 그 교리의 성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사례를 가인과 나란히 놓으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보입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 자체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상태가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유다’에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상태가 담기고, ‘가인’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가 담깁니다. 이름을 붙이는 형식은 같지만, 그 이름으로 나타내는 내용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고대의 명명법은 어떤 특정한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와 성질을 이름에 담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유다’라는 이름의 속뜻 자체로 너무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후반에서 유다와 그의 이름이 나타내는 것을 훨씬 더 깊게 다루지만, AC.340에서는 그것이 논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오직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과 ‘유다’라는 이름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야 독자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과 ‘가인’이라는 이름의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9:35을 AC.340에서 인용한 이유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레아가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어떤 상태와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태고교회의 어떤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의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마치 새롭게 얻은 독립된 무엇처럼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유다의 이름까지 예로 든 목적은 ‘가인’이라는 이름을 읽는 법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 뒤에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를 읽듯이, ‘가인’이라는 이름 뒤에서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 뒤에서는 다시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더 깊은 변화, 곧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 사랑에서 구별되어 하나의 교리와 지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29:35이 AC.340에서 하는 역할입니다.
AC.340, 심화 3, ‘창29:33’
AC.340.심화 3. ‘창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창29:33) AC.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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