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과 ‘형제’(brother)가 이를 의미합니다.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는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 “Abel” and “brother”; a “shepherd of the flock” 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 “tiller of the ground,” 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과 ‘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자손은 신앙이고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의 ‘첫 번째 자손’과 AC.341의 ‘두 번째 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양 치는 자’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 선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자’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땅’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 자’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 신앙’이나 ‘조금 부족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 먼저 배워지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 정해진 규칙을 모두 지켔으므로 좋은 배우자다’라는 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도 신앙이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가?’뿐 아니라 ‘내 신앙은 지금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 역시 체어리티이며,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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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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