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난 레아의 첫 아들들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Reuben)은 신앙을, ‘시므온’(Simeon)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창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를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 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 “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 “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창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 “brother,” and is named “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의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과 형제가 이를 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의 다른 곳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진리가 선과 삶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하여 경쟁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도록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놓으면 AC.342가 보여 주려는 질서가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단지 어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인 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신앙 →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 체어리티’라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우려 하지만, 말씀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신앙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아가며 체어리티를 향합니다.
다만 이 흐름을 ‘먼저 머리로 진리를 알고, 그다음 일정 기간 행동을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인간의 반복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진리와 선을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고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또한 이것을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 그대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AC.337이 말하는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특히 진리를 배워 삶으로 받아들이고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후대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단일한 시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창29:32-34가 인용된 이유도 바로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0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사례를 인용하여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하여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더 넓은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르우벤의 이름이 ‘봄’과, 시므온이 ‘들음’과, 레위가 ‘연합’과 연결되어 각각 더 깊은 의미를 갖지만, AC.342 자체에서는 그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창29:32-34는 세 인물에 관한 별도의 주제를 여는 인용이라기보다 AC.342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이어지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직에 관한 설명도 같은 중심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고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직의 역사나 제도 전체로 논의를 넓히기보다, 왜 이것이 아벨의 ‘양 치는 자’와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아 ‘양 치는 자’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벨 - 체어리티 - 양 치는 자’와 ‘레위 - 체어리티 - 제사장직 - 양 치는 자’가 같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의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부분들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영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양 치는 자’를 곧바로 오늘날의 목회자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342의 직접적인 초점은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 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직 역시 그 본질을 지위나 권위에서 찾기보다 선을 섬기고 사람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인도하는 쓰임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목자가 양을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한다’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AC.343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전개되므로, AC.342에서는 그 주제를 지나치게 앞당겨 확장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단지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어,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방향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곧 신앙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거쳐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가인의 비극은 바로 이 방향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 형제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더욱 무겁게 읽히게 됩니다. 다만 그 구절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AC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고, 여기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만 붙드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342의 핵심은 ‘신앙의 목적지는 신앙 자체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적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단지 머릿속에서 더 많은 교리 지식으로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삶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체어리티와 결합하시도록 받아들이고 있는가? ‘르우벤 → 시므온 → 레위’는 신앙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점에서 체어리티인 아벨이 왜 신앙인 가인의 ‘형제’인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bygrace.kr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bygra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