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73, 강문호 수도사, ‘사과나무와 하나님의 섭리’ (2019122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비’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장 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SY.72, 강문호 수도사, ‘수도와 연못 - 주님 안에 거하기’ (20191217)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선 몇 편처럼 오래된 수도사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강문호 수도사가 충주봉쇄수도원에서 직접 겪은 아주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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