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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78, ‘AI 이렇게 사용하면 설교도 교회도 망칩니다’

bygracetistory 2026. 8. 23. 22:2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의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사는 ChatGPT, Gemini, Claude 같은 AI가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하고, 원어를 살피고, 여러 주석과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예화를 찾고, 설교 구조와 문장을 다듬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문제는 ‘AI 사용하느냐, 사용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언제 AI 여느냐’입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 홀로 서기도 전에 AI부터 열어 버릴 때, 아주 편리한 도구가 오히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영상의 주장입니다.

 

이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천적 의미를 품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천국을 연결하는 신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내는 지적 작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의 속 사람을 만지시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며,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설교 준비 역시 단순한 ‘정보 수집해석구성전달’의 과정일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인용하는 마이클 퀵의 경고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립니다. 설교자가 성경 본문 자체와 충분히 씨름하지 않은 채 곧바로 주석으로 달려가면, 본문을 직접 만나는 대신 ‘다른 사람이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AI는 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책장에서 주석을 꺼내 펼치고 여러 페이지를 읽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본문 한 구절을 입력하고 ‘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의미와 설교 포인트 가지를 알려 ’라고 하면 몇 초 안에 그럴듯한 답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답이 틀렸느냐 맞았느냐만이 아닙니다. 답이 너무 빨리 나온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위험합니다. 아직 설교자 안에서 질문조차 충분히 태어나지 않았는데 답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말씀 앞에서 때로 ‘모르는 상태’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대목이 마음에 걸리는지, 왜 어떤 구절 앞에서는 불편해지는지, 지금 이 말씀이 자신의 어떤 삶을 비추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말씀은 단순한 연구 대상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그런데 AI에게 너무 빨리 물으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보다 ‘ 본문에 대해 무엇을 말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기 쉽습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설교에서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은 ‘설교자의 인격적인 만남과 묵상’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옳지만, 묵상 자체가 설교에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뜨거운 감정이나 눈물, 감동 자체가 신적 생명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본문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참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확신을 주님의 음성으로 오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AI보다 인간의 묵상이 우월하다’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구별하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과 ‘주님에게서 오는 ’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지성과 능력으로 진리를 소유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설교자에게는 이 유혹이 더욱 미묘하게 찾아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원어를 알고 신학적 지식을 갖추었을 때뿐 아니라, 심지어 깊은 묵상과 영적 체험을 했을 때에도 ‘내가 깨달았다’는 자기 소유의 감각이 생길 수 있습니다. AI 역시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유혹을 보탭니다. 방대한 자료를 몇 초 만에 정리하고 멋진 문장과 구조까지 얻으면, 자신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실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 그다음 도구입니다. 먼저 주님 앞에서의 읽기와 묵상, 그다음 주석과 AI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면 ‘말씀기도와 묵상자기 삶에 대한 성찰연구와 검증설교 구성’이라는 질서가 자연스럽습니다. AI는 이 가운데 ‘연구와 검증’과 ‘설교 구성’에서 매우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처음 묵상하면서 발견한 생각이 본문의 문맥과 맞는지 검증하고, 자신이 놓친 역사적·언어적 배경을 확인하고, 반대되는 해석을 찾아보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주님께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자리 자체를 AI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AI를 늦게 사용할수록 오히려 AI를 더 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충분히 읽은 설교자는 AI가 제시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건 본문의 흐름과 조금 다른데?’, ‘ 해석은 특정 신학 전통에 치우친 아닌가?’, ‘ 원어 설명은 확인이 필요하겠는데?’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충분히 읽지 않은 상태에서 AI를 먼저 만나면 AI가 만들어 준 해석의 틀 안에서 이후의 본문 읽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 받은 답이 일종의 안경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I 이전의 묵상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AI를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AI 감동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회개하거나 소망을 붙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AI에는 인간과 같은 영적 인격과 의지,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AI를 통해 얻은 문장이나 자료가 영적으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주석 한 문장, 다른 사람의 설교 한 대목이 우리를 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AI가 정리해 준 자료 역시 주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는 외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에 생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그 진리가 의지와 삶으로 연결되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이것은 ‘아는 ’과 ‘사는 ’의 차이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진리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아직 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지와 결합하고 삶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AI 시대 설교의 진짜 위험도 ‘AI 설교문을 준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만들어 준 진리를 설교자가 자신의 기억과 지성에만 담아 둔 채,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 삶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로 회중에게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문은 훌륭한데 설교자를 통과하지 않은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인용한 ‘먼저 설교자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 않은 말씀은 회중의 가슴도 뜨겁게 없다’는 말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뜨거움’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서적 흥분이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뜨거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 말씀 앞에서 내가 버려야 것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 것은 무엇인가?’, ‘오늘 진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이미 말씀은 머리에서 의지와 삶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I 시대에는 오히려 설교자의 ‘고독’이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연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정보가 너무 빨리 공급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펴고 아무 검색도 하지 않은 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시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그대로 머무는 시간, 설교거리를 찾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제자리에 놓는 영적 질서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영상의 마지막 권면이 힘을 얻습니다. ‘AI 열기 전에, 주석을 펴기 전에, 먼저 성경을 펴라.’ 이것은 단순한 설교 작성 요령이 아닙니다.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도구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AI를 해석해야지 AI가 성경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고, 설교자가 AI의 답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회중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문제는 AI가 아닙니다. AI는 설교자를 훌륭하게 도울 수도 있고, 설교자를 놀라울 정도로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같은 AI를 사용하더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통해 더 깊이 연구하고 자신의 선입견을 검증하며 설교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본문을 읽고 씨름해야 할 시간을 생략한 채 완성된 답을 받아 갈 수도 있습니다. 차이는 기술의 성능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영적 질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AI 설교자의 지성을 도울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좋은 설교자는 AI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가 아니라, ‘무엇을 AI에게 맡기고 무엇만큼은 결코 맡겨서는 되는지 아는 설교자’일 것입니다. AI에게 자료 조사와 비교와 정리와 편집을 맡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홀로 서서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리만큼은 설교자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