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82, 리처드 파인만, ‘우주 최대의 미스터리는 의식이다’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은 처음부터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 우주를 연구하면서 블랙홀과 빅뱅과 원자의 세계까지 파고들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나의 현상, 곧 ‘내가 지금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색을 보고, 아픔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고 압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어느 뉴런이 활성화되고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지를 점점 더 정밀하게 밝힐 수 있지만, 영상이 묻는 것은 그보다 한 걸음 더 깊은 질문입니다. ‘그런 물리적 과정이 왜 느낌을 동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 제목과 구성에는 리처드 파인만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영상에서 전개하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미세소관 이론, 의식과 양자현상의 관계 등은 파인만 자신의 의식 이론이 아닙니다. 영상 자체도 미세소관을 이용한 양자의식 이론은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뒤 등장했으므로 그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을 ‘파인만이 말년에 의식의 비밀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파인만은 이 영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곧 자연 앞에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름다운 이론이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과학자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하고 나면 오히려 영상의 진짜 가치가 더욱 잘 보입니다. 영상은 과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엄청나게 성공했기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질문을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불러주던 자장가를 생각해 봅니다. 음파의 주파수도 측정할 수 있고, 고막의 진동도 분석할 수 있으며, 청각 신경에서 뇌까지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뒤 같은 멜로디를 들었을 때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는 ‘그 느낌 자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상은 바로 이 틈을 집요하게 바라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바로 이 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육체만으로 완결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체와 뇌가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내적 생명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며, 감각기관과 신경계와 뇌는 그 생명이 자연계에서 활동하기 위한 정교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화학적 변화를 발견했다고 해서 영적 인간을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인간의 내적 생명이 어떻게 자연적 기관을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이 차이는 ‘원인’과 ‘수단’을 구별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현이 진동하고 공기가 떨리며 우리의 고막도 진동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 내부를 아무리 분해해도 베토벤의 음악을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 자체가 그 안에서 발견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이 자연계에서 음악을 들려주려면 악기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관에서 육체와 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뇌는 하찮은 껍데기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놀랍도록 정교한 기관입니다. 그러나 기관의 작동을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그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의 근원까지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영상이 말하는 이른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스베덴보리와 뜻밖의 접점을 갖습니다. 빨간 사과를 볼 때 빛의 파장과 망막의 반응과 시각피질의 활동을 모두 설명했다고 합시다. 그래도 ‘왜 나는 빨강을 빨갛게 경험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통증 신호가 척수를 따라 올라가는 과정을 모두 추적했다고 해도 ‘왜 그것이 나에게 아픔으로 느껴지는가?’라는 질문은 그대로입니다. 영상은 현대 과학이 바로 이 지점에서 아직 결정적인 답을 갖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여기서 질문 자체를 조금 바꾸었을 것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라고 묻기 전에 ‘과연 물질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처음부터 뇌가 의식의 생산자라고 전제하면 연구의 방향은 ‘어떤 물질적 과정이 주관적 경험을 만들어내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뇌가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생명이 뇌를 통하여 자연계에 나타난다면, 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신경학적 현상은 의식의 ‘생산 과정’이라기보다 의식이 육체적 차원에서 표현되는 ‘상응하는 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응’을 단순한 비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서로 닮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적인 원인이 외적인 결과 안에서 질서 있게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할 때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고, 어떤 정서를 느낄 때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대응 관계가 매우 정교하게 발견될수록 ‘속의 상태가 겉의 기관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조차도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이것이 영상의 여러 가설과 스베덴보리의 관점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곳입니다. 영상은 의식이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혹시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양자 붕괴와 의식을 연결하는 가능성까지 소개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까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양자장이든 미세소관이든 우주의 어떤 물리적 구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독특하면서도 핵심적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명의 유입’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 살아갑니다.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분은 오직 주님이며, 인간은 그 생명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 생명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선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 생각도 내 것이고 이 생명도 내 것’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의 토대라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상이 반복해서 말하는 ‘내 안에 진짜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읽힙니다. 영상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말들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그 몸속 안에 진짜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약간의 보완이 필요합니다. 마치 육체라는 상자 안에 영혼이라는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은 몸 안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물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 전체의 내적 차원이 영이고, 육체는 그것이 자연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따라서 죽음 역시 ‘의식이 꺼지는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육체라는 자연적 기관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내적 생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났다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이 여전히 생각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오히려 자연계에 있을 때보다 자신이 더욱 온전하게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그는 거듭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뇌와 의식이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다르게 보입니다. 뇌가 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이 활동하려면 뇌와 신경계라는 자연적 기관을 통하여야 하기 때문에 둘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영상 중간에 등장하는 펜로즈와 해머로프의 ‘조화 객관 환원’, 곧 Orch-OR 이론도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영상은 뇌세포 내부의 미세소관에서 양자적 과정이 일어나고, 일정한 순간에 양자상태가 붕괴하면서 의식의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동시에 뇌처럼 따뜻하고 습하며 복잡한 환경에서 그런 양자적 상태가 충분히 유지될 수 있느냐는 반론도 소개하고, 설령 양자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왜 그것이 느낌이 되는가?’라는 근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인정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인정이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을 영혼의 증거로 사용하려는 유혹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 양자역학을 가져오고, 양자역학이 신비하니 거기에 영혼이나 하나님을 집어넣는 식의 논증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했다’와 ‘그러므로 영적 세계가 존재한다’ 사이에는 논리적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언젠가 미세소관의 양자현상을 완전히 설명한다고 해서 영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Orch-OR 이론이 폐기된다고 해서 영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 실재의 근거를 현재 과학의 미해결 영역에 세워 놓으면 과학이 발전할 때마다 신앙의 자리가 줄어드는 이상한 결과가 생깁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훨씬 근본적인 구별을 요구합니다. ‘물질적 과정이 얼마나 정교한가?’와 ‘생명의 근원은 무엇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생겨난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 영적인 것의 종착점이며 효과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가장 미세한 양자현상까지 내려간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물질도 여전히 자연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영상이 의식을 ‘우주의 근본적 구성요소’일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대목도 흥미롭지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한 뇌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와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을 우주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버리면 자칫 범심론적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우주는 스스로 살아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나오며, 피조세계는 그 생명을 질서에 따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의식을 갖는다’와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는 말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상 후반의 동물 의식 이야기도 이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문어와 까마귀와 박쥐와 상어는 인간과 다른 감각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영상은 이를 통해 인간의 경험만이 의식의 유일한 형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오만을 낮추는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단순히 ‘의식의 양’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연적 감각을 넘어 영적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향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유와 합리성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향해 형성될 수 있는 내적 차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단순히 인간의 ‘의식 볼륨’이 더 크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상에서 특히 AI에 관한 대목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고 봅니다. 영상은 인간의 기억과 행동과 말투를 컴퓨터가 완벽하게 복제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나’의 의식이 옮겨갔다는 뜻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실제로 인간처럼 경험하는 존재를 구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구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인간은 정보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쓴 글과 설교와 편지와 음성과 영상을 모두 AI에 학습시켰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AI가 그 사람의 말투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족에게 그 사람이 생전에 했을 법한 말을 하며, 심지어 과거의 기억에 관한 질문에도 정확하게 대답한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정체성은 단순한 기억 데이터의 총합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중심에는 그가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며, 그의 의지와 이해가 있고, 궁극적으로 그의 지배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후에도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중심입니다.
그래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디지털 불멸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애초부터 불멸의 방향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보를 컴퓨터에 복사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를 복제하여 죽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사후에 계속되는 것은 컴퓨터에 저장된 내 정보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형성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상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 아주 가까운 문 앞까지 옵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기계적 처리와 실제 경험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가득한 책이 아니며, 차갑게 재생되는 녹음기도 아니고, 단순히 정보만 처리하는 기계회로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과학의 질문과 영적인 질문이 갈라지면서도 서로를 향해 열립니다. 과학은 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합니다. 그것은 계속 연구되어야 합니다. 뉴런도 연구하고 미세소관도 연구하고 양자현상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연구를 방해하는 대신 훨씬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모든 기관을 통하여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는 생명 자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과학이 모르는 자리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답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과학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며 순간순간 존속합니다. 특히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고, 그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받아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경험은 단순한 생물학적 착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의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아름답게 다시 읽힙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어느 순간 문득 ‘아,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라고 느끼는 평범한 순간을 영상은 ‘우주가 숨겨둔 가장 깊은 비밀’과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 경탄을 굳이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만 그 신비의 최종 목적지는 ‘우주가 스스로 의식을 갖는다’는 데 있지 않고, ‘나는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지금 이 순간에도 생명을 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신앙의 문제는 의식의 수수께끼보다 한층 더 깊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왜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어진 의식과 자유와 합리성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인간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과 자기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만을 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영적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의식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형성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질문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시켜 마지막까지 밀고 가면 질문은 세 번 바뀝니다. 처음에는 ‘뇌는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가?’입니다. 그다음에는 ‘과연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을 나는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첫 번째는 뇌과학의 질문이고, 두 번째는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영적 질문이며, 세 번째는 거듭남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의 가장 큰 가치는 어떤 양자의식 이론이 옳다는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뇌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고도 마침내 ‘느끼고 있는 나’라는 문 앞에서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과학은 그 문 앞에서 계속 실험하고 측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문을 지나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영과 몸, 사랑과 지혜,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근원을 이야기합니다.
파인만이 칠판에 남겼다는 유명한 문장,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영상과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다만 그것을 파인만 자신의 의식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상 역시 당시 파인만이 다른 물리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그 문장을 오늘의 의식 문제에 하나의 비유로 가져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뇌의 구조를 모방하고 언어를 생성하는 기계를 만들며 인간 행동의 놀라운 부분까지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살아 있음’ 그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생명은 인간이 조립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신조차 자기 생명의 원천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소유한 독립적 근원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그 생명을 빌려 쓰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 않으시고 놀랍게도 완전히 ‘나의 생명’인 것처럼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도 있고, 생각할 수도 있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그 선택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의 인격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왜 의식이 있는가?’라는 현대 과학의 거대한 질문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짧게 답하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놀라운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사랑하고 느끼며 살아 있다는 그 모든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완전히 당신 자신의 것처럼 주어진 까닭은 무엇인가?’
그 질문 끝에서 의식의 신비는 마침내 거듭남의 문제와 만납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의식은 그 자체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그릇입니다.
그렇게 보면 밤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지금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의 중심에는 ‘의식을 가진 우주’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관계 안에서, 과학이 아직 풀지 못한 ‘의식의 신비’는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한 지적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묻는 영적인 질문으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