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That “Abel” signifies charity has been shown before. By charity is meant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for he who loves his neighbor as himself is also compassionate toward him in his sufferings, as toward himself.
해설
AC.351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charity)를 무엇으로 이해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아벨’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가 ‘그러면 체어리티란 실제로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 답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선행’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선행은 체어리티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모습이지만, 체어리티 그 자체는 그보다 안쪽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떤 행동이 외적으로 선해 보인다고 해서 그 자체로 곧 체어리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의 AC.348에서 보았듯이 행위의 생명은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AC.351은 ‘이웃을 향한 사랑’에 곧바로 ‘자비’(mercy)를 연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추상적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 그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고통을 당할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처럼’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웃의 고통을 단순히 ‘저 사람에게 일어난 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일처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모든 감정과 고통을 문자 그대로 자신이 똑같이 느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이웃의 어려움을 자기와 무관한 것으로 밀어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자비’는 체어리티의 매우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사람의 선을 위해 무엇인가 하려는 데서 체어리티의 성질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자비는 단순한 감상이나 일시적인 연민에 머물지 않습니다. 바로 앞 AC.348-350의 흐름을 함께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AC.348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가 살아 있는 열매라고 했고, AC.349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것이 외적 예배에 생명을 준다고 했으며, AC.350에서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51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체어리티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을 하나로 연결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돌아보는 내적 애정이며, 그 체어리티가 실제 행위로 나타나면 살아 있는 ‘열매’가 되고, 그 체어리티에서 주님을 향하면 살아 있는 ‘예배’가 됩니다. 결국 삶과 예배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셈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대조를 더욱 깊게 이해하게 합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단순히 아벨이 ‘선’을 나타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라는 교회의 생명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어떤 추상적인 덕목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바로 그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왜 ‘신앙이 아닌 신앙’이 되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진리를 알고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선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신앙에는 신앙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알수록 이웃을 더 깊이 바라보고, 그의 필요와 고통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이끕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를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351은 체어리티의 한 중요한 성질을 ‘자비’라는 측면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궁극적으로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 선을 위해 행하는 삶 전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위로하고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잘못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도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기준은 언제나 ‘이웃의 참된 선을 원하는가?’에 있습니다.
특히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이라는 표현은 체어리티가 얼마나 깊은 결합의 사랑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웃이 나와 아무 관계없는 타인이 아니라, 그의 선과 행복이 나에게도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 사람의 문제’로 밀어내지만, 체어리티는 그 경계를 넘어 이웃의 상태에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근원 역시 앞의 AC.350에서 본 것처럼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양 떼의 처음 난 것’과 ‘기름진 것’이 오직 주님께 속한다고 했듯이, 참된 체어리티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억지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선과 고통을 자기 일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거듭남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결국 AC.351은 짧은 한 문장으로 ‘아벨’의 성격을 매우 따뜻하고 실제적으로 보여 줍니다. 아벨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체어리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체어리티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이웃이 고통당할 때 자신의 고통을 대하듯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한다는 것은 단지 두 신학 개념을 올바르게 연결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믿는 진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그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랑으로 변해 가는 것을 뜻합니다.
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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