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그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기록된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입니다. 이것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 분명하게 지각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악한 영들에게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amori proprio)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 반발을 일으키며, 이것이 분노로 나타납니다. 말씀에서는 ‘분노’(anger), ‘진노’(wrath), 심지어 ‘격노’(fury)까지도 여호와께 자주 돌려지지만,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Cain’s anger was kindled” signifies that charity had departed is evident from what is afterwards related of his killing his brother Abel, by whom is signified charity. Anger is a general resulting from whatever is opposed to self-love and its cupidities. This is plainly perceived in the world of evil spirits, for there exists there a general anger against the Lord, in consequence of evil spirits being in no charity, but in hatred, and whatever does not favor self-love [amori proprio] and the love of the world, excites opposition, which is manifested by anger. In the Word, “anger,” “wrath,” and even “fury,” are frequently predicated of Jehovah, but they are of man, and are attributed to Jehovah because it so appears, for a reason mentioned above. Thus it is written in David:
49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50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으며 (시78:49-50) He sent against them the anger of his nostril, and wrath, and fury, and trouble, and an immission of evil angels;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he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Ps. 78:49–50)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시고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셨다’(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고 덧붙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와 다투던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사45:24)고 말합니다. 이로부터 ‘분노’(anger)는 악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Not that Jehovah ever sends anger upon anyone, but that men bring it upon themselves; nor does he send evil angels among them, but man draws them to himself. And therefore it is added, that he “hath weighed a path for his anger, and withheld not their soul from death”; and therefore it is said in Isaiah, “To Jehovah shall he come, and all that were incensed against him shall be ashamed” (Isa. 45:24), whence it is evident that “anger” signifies evils, or what is the same, a departure from charity.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사45:24)
해설
AC.357은 앞의 AC.355에서 짧게 제시했던 ‘분노는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뜻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가인의 분노만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분노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악한 영들이 왜 주님께 분노하는지, 더 나아가 성경에서 왜 사랑 자체이신 여호와께 ‘분노’와 ‘진노’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는지까지 연결합니다. 짧지 않은 한 단락 안에 인간의 악, 지옥의 상태, 말씀의 외관이라는 세 주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분노가 체어리티의 떠남을 뜻한다는 근거를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서 찾습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분노했다’는 것은 아직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킨 최종 상태는 아니지만, 이미 체어리티가 떠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것을 죽이는 데까지 이를 내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AC.355에서 보았듯이 가인의 타락은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교리가 되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기며, 이제 체어리티를 향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다음 단계가 아벨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분노’의 근원을 매우 날카롭게 설명합니다. ‘분노는 자기 사랑과 그 욕망들에 반대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적인 결과’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적인 분노를 무조건 자기 사랑이라고 단정한다는 뜻으로 읽기보다는, 여기서 다루고 있는 영적 의미의 분노, 특히 악에서 나오는 분노의 근원을 밝히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 사랑이 되면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이익, 자기 명예, 자기 판단이 관철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그것을 막으면 반발이 일어나고, 그 반발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 분노입니다.
이렇게 보면 가인이 왜 분노했는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동생의 제물은 받아 주셨는데 내 것은 받아 주시지 않았다’는 형제간 질투가 아닙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옳고 자신이 우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질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질서가 가인의 자기주장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아벨, 곧 체어리티의 존재 자체가 가인에게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분노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사람은 때때로 ‘진리를 지키기 때문에 화를 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에 분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교리, 자기의 신앙적 위치, 자기의 명예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를 ‘진리를 위한 열심’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AC.357은 그때 그 분노의 더 깊은 곳을 살펴보게 합니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것은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원리가 ‘악한 영들의 세계’에서는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을 향한 일반적인 분노’가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거나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체어리티가 없고, 증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지배적 사랑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그 사랑에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것에 반발합니다.
여기에는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의 상태에 따라 같은 주님의 질서가 전혀 다르게 경험됩니다. 주님과 천국의 질서를 사랑하는 천사에게는 그것이 기쁨과 평안이지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삼은 악한 영에게는 바로 그 질서가 자기 욕망을 제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께 분노합니다.
이 원리가 곧바로 성경의 ‘여호와의 진노’ 문제로 이어집니다.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며, 심지어 격노하시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많습니다. 문자적으로만, 그러니까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감정이 격해져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57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여호와께 돌려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설명할 때 자주 다루는 ‘외관’의 원리와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돌아서 악 가운데 들어가면, 그 결과로 고통과 심판을 경험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자기를 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 즉 겉으로는 인간에게 그렇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속뜻에서는 원인이 주님의 분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사랑과 질서에서 돌아선 데 있습니다.
시78:49-50이 좋은 예입니다. 겉으로만 읽으면 하나님께서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를 보내시고, ‘재앙의 천사들’을 보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즉시 ‘여호와께서 실제로 누구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한 천사들에 관한 설명입니다. 주님께서 악한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애정에 따른 결합’의 원리와도 맞닿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영적 사회와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면 그에 상응하는 천국적 영향에 자신을 열고, 악과 거짓을 사랑하면 그와 같은 사랑을 가진 악한 영들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악한 영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자신의 사랑의 방향이 그들과의 결합을 불러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불러들인다’는 말을 단순한 인과응보 정도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의 지배적 사랑이 자기와 같은 성질의 영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선택하면 그것과 같은 사랑을 가진 영들과 점점 가까워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면 천국의 질서와 가까워집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상벌 이전에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노여움이 나아갈 길을 닦으셨다’는 시78:50의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인간이 선택한 악의 결과가 진행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을 말씀의 문자에서는, 즉 말씀은 겉으로는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표현한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악을 만들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악으로 향할 때, 그것을 무조건 제거하여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다만 섭리 안에서 악을 제한하시고, 가능한 한 선한 결과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허용된 것이 겉으로는 때때로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것처럼 표현됩니다.
이 점에서 AC.357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에게 사랑과 반대되는 인간적인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 안에 사랑과 진노라는 서로 상반된 두 상태가 존재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선 자체이십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향할 때, 그 사랑을 복으로 경험하고, 등을 돌려 자기 사랑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동일한 신적 질서를 자기 욕망에 반대되는 것으로 경험합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빛을 등지고 어둠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이 ‘태양이 내게서 빛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태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방향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비유이지만, AC.357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분노’의 외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은 다시 가인에게 돌아옵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향하여 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이 분노합니다. 주님의 질서가 가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의 가인의 분노는 단순한 감정 묘사가 아니라 지옥적 사랑의 원리가 처음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의 AC.352-354와 대비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아벨의 ‘기름’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을 나타냈고, 그 사랑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반면 AC.357의 가인에게서는 자기 사랑(amori proprio)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사랑’이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갈등은 결국 이 두 사랑의 질서가 충돌하는 문제로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57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분노’가 ‘악’을 상징하며, 같은 말로 하면 ‘체어리티가 떠난 상태’를 상징한다고 결론짓습니다. 이 두 표현은 사실 하나입니다. 체어리티가 떠난 빈자리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자기에게 반대되는 것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가인의 분노는 바로 그 내적 변화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결국 AC.357은 우리에게 분노 자체보다 그 분노의 ‘근원’을 보라고 합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거슬렸기에 분노하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 반발하는가, 주님의 선과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뜻과 명예와 판단을 지키기 위해 화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분노는 때때로 내 안에서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글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분노와 악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악한 천사를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도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설 때 자기 사랑과 같은 성질의 악을 자기에게 끌어당기며, 그 결과가 마치 주님의 진노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반항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이 체어리티를 떠나 자기 사랑으로 향할 때, 그의 내면과 영적 환경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AC.357, 심화 1, ‘하나님께서 악한 천사를 보내시는가? - 여호와의 진노와 말씀의 외관’(시78: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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