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는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라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체어리티가 떠났으며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means that conscience dictated; that his “anger was kindled, and that his countenance fell,” signifies as before that charity had departed, and that the interiors were changed.
해설
AC.359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355-358에서는 가인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자기 위치를 주장하면서 체어리티가 떠났고, 그 결과 ‘분노가 타올랐으며’, 마침내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뜻밖에도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가인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상당히 나아갔습니다. 그의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그 분리는 교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분노했고 그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들립니다.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이며, 아직 돌이킬 수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그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주님과 양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양심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독립적인 도덕 감각이라기보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내적 자리와 관계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알고, 악을 행하려 할 때 안에서 거리낌을 느끼며, 선을 행해야 한다는 내적 촉구를 받는다면 그 양심을 통하여 주님께서 그를 악에서 돌이키고 선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에게 들린 ‘여호와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그의 내면에서 ‘지금 네 상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알리는 경고입니다. 이어지는 창4:6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질문도 주님께서 가인의 상태를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 자신이 자기 내면을 보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네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났느냐? 왜 네 내적인 것들이 이렇게 변하고 있느냐?’라고 양심을 통하여 자기 상태를 돌아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인간의 거듭남에서 양심이 하는 역할을 잘 보여 줍니다. 악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순간 인간이 즉시 돌이킬 수 있다면 악은 행동으로 완성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를 정당화하며 계속 키울 수도 있지만, ‘왜 내가 이렇게 분노하는가?’라고 자기 상태를 주님 앞에서 살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틈에서 양심의 음성이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빼앗아 강제로 분노를 제거하지 않으시지만, 진리를 통하여 그 분노를 보게 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래서 AC.359를 이후의 아벨 살해 사건을 알고 읽으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가인은 경고 없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에 주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고 내적인 것들이 변하고 있을 때 양심이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악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를 강제로 없애시지는 않지만, 인간이 악을 실제로 행하기 전에 진리를 통하여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앞의 AC.357-358과도 아름다운 연결이 생깁니다. AC.357에서는 주님께서 인간에게 분노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사랑으로 말미암아 분노한다고 했습니다. AC.358에서는 주님의 얼굴이 실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 곧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59에서는 바로 그렇게 변한 인간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돌아서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자비를 거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의 양심을 통하여 다시 돌아오도록 부르십니다.
따라서 이 짧은 글에는 매우 중요한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가인이 분노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잘못된 상태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그 상태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내적인 것이 변했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까지 즉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직접 적용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분노나 질투, 자기 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올라올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그런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 정당화하여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왜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가?’, ‘내가 지키려는 것이 정말 주님의 진리인가, 아니면 나의 자존심과 proprium인가?’, ‘내 안에서 체어리티가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살피는 순간, 그 질문 자체가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돌이키시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경우에는 종교적 자기 정당화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기 상태를 돌아보기보다 분노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왜?’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가인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자기 내면을 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참된 회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외부의 아벨을 문제 삼기 전에 자기 안의 분노와 떨어진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59의 ‘양심이 말해 주었다’는 표현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이 이미 알고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의 내면을 비추시고, 현재의 애정과 행위가 그 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지각하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아직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AC.359는 가인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아벨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후의 말씀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강제로 제거하여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도, 양심을 통하여 끊임없이 악을 보게 하시고 선을 선택하도록 부르십니다.
따라서 AC.359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 안에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날 때 나는 무엇을 듣는가?’입니다. 분노가 들려주는 자기 정당화만 듣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왜 네가 분하여 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지의 문제입니다. 거듭남에서는 악이 전혀 올라오지 않는 것만큼이나,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양심의 빛 가운데 보고 주님께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의 얼굴이 이미 떨어진 순간에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인간이 넘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주님의 자비와 회복의 부르심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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