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87, 강문호 수도사, ‘수도학교 이야기’ (202001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를 왜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 출발의 계기와 초기 과정을 직접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앞선 영상들이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일화, 아토스 체험, 수도 영성의 가치 등을 소개했다면, 이번 영상은 그 관심이 어떻게 한국 개신교 안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교육 과정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을 때에는 수도학교라는 제도 자체를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보다, 그 출발점에 있었던 ‘거룩한 삶을 배우고 전하고 싶다’는 열망과 그것이 실제로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학교의 직접적인 계기로 제시하는 것은 세겜의 야곱의 우물에 세워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도사입니다. 영상의 자동자막은 지명과 상황을 상당히 흐트러뜨리고 있어 세부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확정하기 어렵지만,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사라진 지역에서 홀로 수도원을 지키던 노수도사가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취지로 말하고, 이어 강문호 수도사에게 ‘수도사를 양성해서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말을 자신의 표현대로 ‘5만 볼트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받아들였고, 여기에서 수도학교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합니다.
이 대목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반드시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떠나지 않는 것’ 자체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교회의 생명은 외적 규모나 사람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 안에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 그리고 그 선을 밝혀 주는 진리가 살아 있다면 그곳에 교회의 본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면 이곳에서 예수님이 없어진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그 지역에 그 수도사 한 사람만이 주님을 대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읽으면 상당히 울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특정 수도원이나 수도사에게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어떤 지역에서 마지막 기독교인이 떠났다고 해서 그곳에서 주님까지 떠나시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볼 수 있는 교회의 경계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양심과 선을 향한 애정이 남아 있고, 자신이 아는 진리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려는 삶이 있다면 주님은 그 사람에게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일화의 가장 깊은 의미는 ‘그 수도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기보다, ‘그 수도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끝까지 살고자 했다’는 데서 찾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문호 수도사가 곧바로 ‘수도사 파송’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 것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교사 파송에는 교통비와 생활비, 활동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미 형성된 수도원에 수도사를 보내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발상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선교의 효율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파송하는가?’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도사라는 외적 신분을 얻는 것과 그 사람의 속 사람이 실제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어쩌면 ‘수도학교를 만들자’가 아니라 그보다 앞에 있는 ‘거룩한 영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거룩’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룩은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도 아니고, 금욕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며, 수도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거룩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주님께로 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조금씩 물러가며,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가 실제 이웃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그것을 돕는 하나의 외적 형식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닙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처음 열두 명을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여 보내셨다는 데서 착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열두 명이 모이고, 계속 지원자가 생겨 스물넷, 마침내 서른여섯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입니다. 이 부분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감사할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는 표지는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적게 모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외적 성공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목적’과 그 목적에서 나오는 ‘수단’, 그리고 마침내 맺히는 ‘쓰임(use)’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사람이 몇 명 모였는가?’보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수도사가 몇 명 배출되었는가?’보다 ‘그들의 proprium이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몇 기까지 이어졌는가?’보다 ‘그 과정을 통하여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수도학교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신학교도, 교회도, 선교단체도, 수도원도,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공부하는 모임도 똑같습니다. 지식과 제도가 커졌는데 자기 사랑도 함께 커진다면 외적 성장은 내적 성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수도사도 없고, 교수도 없고, 교재도 없고, 공부할 교실도 없었다’며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다고 회고하는 부분은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합니다. 아무 기반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교육 과정을 만들고 교재와 커리큘럼을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를 요구합니다. 고대·중세·현대 수도원, 수도원의 역사와 영성, 아토스와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공부하도록 구성한 것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기독교 수도 전통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의 중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도원의 역사와 위대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수록 자칫 ‘비범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얼마나 금식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절제했는지가 수도 영성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복음의 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해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곳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주님’입니다. 수도사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도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강문호 수도사가 영상 말미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마르는 빨래가 어디 있느냐’는 취지로 초기의 어려움을 표현하는 대목은 오히려 수도학교의 본질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영적 훈련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때 무엇을 붙드는 사람인가를 드러냅니다. 시행착오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영적 성숙의 증거도 아닙니다. 자신의 오류를 보고 인정하며 돌이키는 과정까지도 주님은 거듭남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루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의 무엇을 보여 주시고 고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영상은 이후 수도학교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미리 가져와 판단하지 않고, ‘출발 당시의 영상’ 자체로 읽는 것이 가장 공정하겠습니다. 이 영상 속 강문호 수도사에게서는 분명한 열망이 보입니다. 자신이 해외 수도원들을 다니며 받은 충격과 감동을 한국 개신교 안에 소개하고 싶었고, 그것을 일회성 세미나로 끝내지 않고 사람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출발점에 조용히 하나의 문장을 덧붙인다면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수도사를 만드는 것보다 먼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라.’ 수도복도, 수도학교도, 커리큘럼도, 금욕도, 공동생활도 모두 외적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겨야 하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이며, 그것이 일상의 체어리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가장 정교한 수도 제도도 외적 형식에 머물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수도원 밖에서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 앞에서 깊은 거듭남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에서 시작된 ‘수도학교’의 꿈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길은 수도사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자기 공로를 낮추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살피며, 주님께 모든 선의 근원을 돌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수도학교의 진정한 열매는 졸업생 명단이나 수도원 숫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거룩한 영을 전하는 학교’라는 강문호 수도사의 처음 소망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Y.84, 강문호 수도사, 수도원 7년, ‘청빈·거룩·오직 예수’를 다시 생각하다 (20260826)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앞서 살펴본 개별 수도사 이야기들과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은퇴 후 약 7년 동안 수도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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