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91, 박요한 목사, ‘내가 장로와 당회를 없애버린 이유’ (20260724)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먼저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을 본질로, 조직과 제도와 건물과 직분 같은 것은 비본질로 구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로 보지 않고,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의 생명이 받아들여지는 상태와 깊이 연결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건물, 직제, 교단, 예배 형식 등은 교회를 위한 외적 그릇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교회의 생명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새 포도주와 새 가죽 부대’ 비유를 박요한 목사가 교회의 제도와 형식의 갱신 문제에 적용한 것도 나름의 설교적 힘이 있습니다. 오래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고 스스로 절대화될 때, 오히려 새롭게 역사하는 생명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외적인 것은 반드시 내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외적 형식이 내적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면 좋은 것이지만, 그릇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가죽 부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가죽 부대가 포도주를 담고 있는가’입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가 직분을 ‘계급’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비판한 대목은 의미가 있습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의 직분이 본래는 섬김을 위한 기능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명예와 권세와 특권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직분과 지위는 ‘용도(use)’를 위해 존재합니다.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을 통해 얼마나 선한 용도를 수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분이 ‘나는 이만큼 높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장의 수단이 된다면, 외적으로는 교회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proprium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균형은 필요합니다. 직분이나 제도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계급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구조를 제거하는 것이 곧 영적으로 더 높은 상태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제도가 없어도 사람의 자기 사랑과 지배욕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도가 없을수록 특정 개인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이 없는 교회’라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분이 있든 없든 권한을 자기 영광이 아니라 용도를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구조의 유무보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사랑의 성질을 더 중요하게 봅니다.
박요한 목사가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것도 핵심을 잘 짚은 부분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목사도, 장로도, 특정 헌금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교회관과도 잘 맞습니다. 참된 교회는 주님에게 속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맡겨진 용도를 수행할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교회를 ‘내 교회’, ‘내 성도’, ‘내 조직’으로 소유하려는 순간, 주님의 것이 인간의 proprium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박요한 목사는 전통 교회의 문제를 주로 장로 중심 구조나 당회 구조에서 찾습니다. 이 부분도 조금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의 문제는 장로교의 당회라는 특정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독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회중제가 강한 교회에서는 다수의 여론이 또 다른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정치가 없는 교회’라고 선언한 공동체에서도 비공식적인 영향력과 인간관계가 정치처럼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가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임직헌금에 대한 비판도 이 설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를 세우면서 상당한 금액의 임직예물을 요구하거나 자발적 감사헌금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경쟁을 유도하는 관행을 문제 삼습니다. 이 지적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돈과 영적 지위를 연결하면, 외적 재산이 내적 가치와 섞이기 쉽습니다. 헌금 자체는 선한 용도가 될 수 있지만, ‘내가 이만큼 냈으므로 이만큼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오면 그 헌금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헌금을 많이 하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입니다. 그 취지는 헌금 액수와 영적 권위를 연결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핵심은 액수 자체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적게 드린다고 자동으로 겸손한 것도 아니고, 많이 드린다고 자동으로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행위의 외형보다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봅니다. 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선한 용도를 위해 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헌금 문제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를 드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여 드렸는가’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와 교회 활동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교회 활동이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하고 정작 예배 시간에 졸게 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예배가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외적 활동이 내적 목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교 전체의 논리와 일관됩니다. 교회 봉사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이 된다면, 외적 종교 활동이 오히려 내적 신앙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아버지의 중요한 가족 행사보다 제자훈련 참석을 더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비판한 대목은 체어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할 만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 프로그램에 많이 참석하는 것으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 이웃에 대한 성실함, 직장에서의 정직함 역시 모두 신앙이 삶으로 나타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예배는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이루어집니다. 주일의 예배가 삶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가족을 무시하거나 일상의 의무를 경시하게 만든다면 외적인 종교성과 실제 체어리티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박요한 목사가 ‘주일 예배도 한 번씩 빠지는 것이 좋다’, ‘오기 싫으면 유튜브로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외적 예배를 절대화하지 말자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외적 예배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예배를 무의미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적 예배는 내적 예배를 담고 유지하는 중요한 그릇입니다. 문제는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 안에 생명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반드시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식의 압박도 잘못이지만, ‘마음만 있으면 형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설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 가운데 하나는 ‘유튜브가 교회다’라는 선언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온라인으로 실시간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현장 참석자와 동일하게 성도로 인정하며, 유튜브를 오프라인 교회로 끌어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형태 변화 속에서 상당히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교회는 반드시 특정 장소에 모여야 하는가?’ ‘한 공간에 있지 않아도 교회적 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본질은 장소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과 체어리티가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들이 진리와 선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점에서 박요한 목사의 ‘예배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내가 교회다’라는 강조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을 사람 자신에게 적용한 것도 방향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다’라는 말 역시 조금 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 개인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교회 전체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이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실 때 그 사람 안에 교회의 형상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더 넓은 의미의 교회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내 안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가야 합니다. 내 안에서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 있는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 되어 있는가, 주님이 중심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중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박요한 목사가 ‘오무’를 강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뒤이어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무엇을 없앴는가보다 무엇이 살아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계급이 없고, 정치가 없고, 임직헌금이 없고, 건물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생명과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직분과 건물이 있고 제도가 있어도, 그것들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섬기고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외적 질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번 설교의 ‘오무’는 목적이라기보다 정리 작업에 가깝습니다. 낡은 가죽 부대의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워낸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박요한 목사는 그것을 ‘십자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삶,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설교에서 바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부분은 복음주의적 설교의 중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대속 교리의 한 문장’으로만 축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지옥들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영화롭게 하신 완성의 사건이며, 동시에 사람이 주님을 따를 때 겪는 시험과 자기 부인의 삶을 보여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라는 말이 참으로 깊어지려면 ‘십자가를 믿는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후반의 ‘목사가 노동하는 교회’라는 강조도 스베덴보리의 ‘용도’ 개념과 접점이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육체노동이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노동을 통해 현실 감각을 잃지 않고, 게으름을 피하며,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의 어려움을 더 이해하게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노동 그 자체를 영적 수행으로 절대화할 필요는 없지만, 선한 용도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이 영적 성장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설교에서는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고난을 ‘메기’에 비유하면서 영혼을 깨우는 축복의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돌아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이 영적 각성을 위해 보내신 도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론에서 주님은 악이나 고통 자체를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발생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한 선을 끌어내시고, 그것을 사람이 거듭나는 방향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통을 보내셨다’보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도 선을 이루신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설교 초반에서 스트레스와 근심이 당뇨, 비만, 암 등의 가장 큰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설교의 영적 주제와는 별도로 신중해야 합니다. 육체 질병은 여러 복합적인 원인을 갖기 때문에 영적 상태나 심리적 스트레스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비본질에 매달리다가 삶의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설교적 비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의학적 인과관계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 해설에서도 설교의 중심 진리와 주변의 과도한 표현을 구별해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대목은 ‘묵은 것을 얼마나 잘 벗어내느냐’라는 표현입니다. 박요한 목사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오히려 익숙한 형식에 갇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낡은 proprium의 습관과 사랑을 벗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새 가죽 부대’는 새 예배 형식이나 새 교회 모델보다 먼저 ‘새로워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조금 더 깊게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장로 제도, 당회, 임직헌금, 건물 중심주의를 낡은 가죽 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을 다 없앤 새로운 교회를 한다’는 생각 자체도 시간이 흐르면 또 하나의 묵은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 ‘우리는 더 본질적이다’, ‘우리는 제도를 벗어났다’는 자의식이 굳어지는 순간, 새로움을 추구하던 개혁 자체가 새로운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언제나 ‘저쪽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한 교회도 내일이면 낡을 수 있고,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도 자기 방식에 집착하면 새로운 제도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외적 형식을 한 번 바꾸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 앞에서 계속 자기 자신을 수정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자면, 새 포도주는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과 진리이고, 새 가죽 부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워진 사람의 마음과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교회 제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것을 주님의 진리 앞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는가, 내 전통과 경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가, 내가 가진 지위와 익숙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요한 목사 자신에게도,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장로들이 문제다’, ‘전통 교회가 문제다’, ‘건물 교회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시 나단의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제도주의와 자기 의가 내 안에는 없는가? ‘나는 개혁적이다’라는 자기 의는 없는가? ‘나는 본질을 안다’는 교만은 없는가? 개혁의 영은 남의 낡음을 벗겨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안의 낡음을 벗겨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설교의 중심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다시 표현한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참된 새 가죽 부대는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교회 모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계속 자기 proprium을 벗어내고 새롭게 되는 사람이며, 참된 교회 개혁은 외적 형식을 제거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나게 하는 데서 완성됩니다.’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내가 교회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방향에서 읽으면 더 깊어집니다. ‘예배당이 교회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선언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교회인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는가, 내 안에 주님의 진리가 있는가, 그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나는가, 내 삶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용도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건물이 없어도 교회가 아닐 수 있고, 이것이 있다면 작은 공간에서도 참된 교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한 부분은 ‘무엇을 없앴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입니다. 조직과 제도와 건물은 모두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새 가죽 부대도 내일은 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진리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과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새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 자신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무를 추구하는 교회’라는 표어도 결국 ‘오무’(五無)보다 ‘일유’(一有)가 더 중요해집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없앴는가보다, 그 모든 것을 벗겨낸 뒤 ‘주님이 계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과 진리가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가장 깊은 자리이고, 이번 설교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SY.89, 박요한 목사, ‘극우 정치병자 소굴이 된 한국교회의 비참한 실상’ (2026071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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