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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bygracetistory 2026. 8. 29. 16:19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하였는데, 이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sin lying at the door) 것이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악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마귀(devil) 불리는데,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는 사람이 체어리티가 결여되어 있을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Secondly, it is sai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which signifies,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ere is no charity present, but evil. Everybody can see thatsin lying at the dooris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 for when there is no charity there are unmercifulness and hatred, consequently all evil. Sin in general is called thedevil,who, that is, his crew of infernals, is ever at hand when man is destitute of charity; and the only means of driving away the devil and his crew from the door of the mind is love to the Lord and toward the neighbor.

 

 

해설

 

AC.364는 앞의 AC.363과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를 설명하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4에서는 그 반대편을 보여 줍니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곧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악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두 글을 함께 놓으면 선한 의도와 체어리티그리고 체어리티의 부재와 이라는 선명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가 없다는 상태를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그저 아직 사랑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고, 따라서 온갖 악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는 단순히 여러 기독교적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들어와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근본적인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악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들어올 준비를 하고 들어오기를 원하는 (evil ready and desirous to enter)이라고 풀이합니다. 아직 악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은 문에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가인의 상태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적인 애정이 생겼지만, 체어리티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다음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악이 문에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계입니다. 안과 밖이 만나는 자리이며, 무엇인가가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다만 AC.364에서는 아직 의 상응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한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분명한 것은 악이 인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가까이 와 있으며,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가 그 악에게 문을 열어 주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를 일반적으로 마귀(devil)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마귀, 그의 지옥의 무리(his crew of infernals)라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악을 단순한 추상적 개념으로만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그와 상응하는 지옥의 악한 영향이 가까이하게 된다는 스베덴보리 특유의 영계 이해가 배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사람에게 악을 집어넣으므로 인간은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의 질서에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양쪽으로부터 오는 유입 가운데 무엇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와 관련하여 자유를 가집니다. 악한 영들이 가까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자동으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자기 의지와 결합하여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악의 가까움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앞 AC.359-360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지고 체어리티가 떠난 바로 그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이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악이 행위로 완전히 굳어진 뒤에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인간의 마음 문 앞에 와 있을 때 미리 알게 하십니다. 가인이 분노를 느낀 것과 아벨을 죽인 것 사이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섭리의 모습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강제로 악을 제거하시지는 않지만, 악을 보고 거절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과 진리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AC.364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이 글 전체의 결론이면서 매우 강력합니다. ‘마귀와 그의 무리를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악과 싸우려면 의지를 강하게 가져라거나 올바른 교리를 확실히 믿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악을 마음의 문에서 물리치는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이야기를 읽어 온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악이 문에 엎드려 있을 때 해결책이 강한 신앙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 다시 사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도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웃을 향한 사랑을 함께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둘은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향하여 그 사랑이 흘러가며, 이웃을 향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물리치는 힘이 인간 자신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의 선이 인간 안에서 악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와 그의 무리를 몰아낸다는 표현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옥과 싸워 이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면, 그 사랑과 함께할 수 없는 악과 거짓이 물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시고 이기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고 악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63AC.364는 한 쌍을 이룹니다. AC.363에서는 선을 의도함 체어리티가 함께 있음 얼굴이 들림이라는 길을 보여 주고, AC.364에서는 선을 의도하지 않음 체어리티가 없음 악이 문에 있음이라는 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 서 있는 가인에게 주님께서는 아직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무서운 경고만은 아닙니다. ‘아직 문에 있다는 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고, 아직 체어리티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아직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인이 해야 할 일은 문 앞의 악과 자기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다시 사랑의 질서 안으로 돌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AC.364가 가르치는 것은 악을 이기는 길 역시 체어리티라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가 없어진 자리에 악이 들어오며, 체어리티가 회복되면 악은 물러납니다. 그래서 창4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점점 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교리 논쟁을 넘어 인간 마음의 생명과 죽음의 문제가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악이 마음의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AC.363, 창4:6,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3 ‘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는 이 절에 대한 설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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