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비교가 아니라, ‘둘이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라는 것이 점점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는 신앙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를 아주 단호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 이 말은 스베덴보리의 신앙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한 것이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선에서 떨어져 독립하려 하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곁에 붙어 있는 부수적인 덕목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점을 AC.365는 불꽃과 빛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열은 사랑에, 빛은 진리에 해당합니다. 불꽃에서 빛이 나오는 것처럼 사랑에서 진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열과 빛이 함께 있을 때 생명이 자랍니다. 봄과 여름의 햇빛이 그러합니다.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이 함께 있기 때문에 씨앗이 싹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불꽃에서 열을 제거하고 빛만 남기면 어떻게 될까요?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합니다. 겨울에도 분명 빛은 있습니다. 오히려 맑은 겨울날의 빛은 아주 선명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윤곽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일으키는 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은 굳고, 나무는 얼며, 생명 활동은 멈춥니다. 바로 이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있고, 교리를 매우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참된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합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지,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성경을 얼마나 바르게 해석하는지를 신앙의 중요한 척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그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선하게 대하며,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의 열을 가진 살아 있는 빛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자기 우월감이 커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한다면 그 빛은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너무 높였습니다. AC.362는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질서가 뒤집혔습니다. 본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했지만, 오히려 사랑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했습니다. 그래서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그것을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고 했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사랑이 중요하니 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착하게 살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뜻과 거리가 멉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무엇이 참된 선인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쉽게 맹목적인 애정이나 자기 방식의 친절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체어리티는 반드시 결합되어야 합니다.
다만 그 결합에서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을 사랑하고 행하기 위해 삽니다. 교리는 그 자체로 최종 목적이 아니라 삶을 주님의 질서에 맞추도록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길 때, 신앙은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서려 할 때,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는 질서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리의 정확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 해석의 정통성을, 어떤 교회는 특정 신앙고백이나 교단적 전통을, 어떤 교회는 성령의 은사나 종말론이나 예배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전체보다 앞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진리를 가르치는 목적이 이웃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기는 것이 되면 이미 겨울의 빛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응을 알고,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고,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지식이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자기 사랑과 결합하면, 진리의 빛은 점점 차갑게 변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체어리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위험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AC.365는 신앙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의 ‘온도’를 묻게 합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있는가? 진리는 있는데 사랑이 있는가?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가 있는가?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 지식이 나를 더 온유하게 만드는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더 살리게 되는가, 아니면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신앙의 생명을 점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주도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연적 친절이나 감정적 따뜻함이 신앙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받아 그것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는 영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입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선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져 이웃을 향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64와 AC.365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AC.364에서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무자비함과 증오와 악이 들어오고, 그 악을 마음의 문에서 몰아낼 유일한 수단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라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즉 체어리티는 단지 신앙을 따뜻하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악을 물리치고 신앙에 생명을 주는 실제적인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이 주도하셔야 한다’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이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체어리티를 만들어 내서 신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선이 신앙과 진리를 질서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인간의 선행이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선이 인간의 진리를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와도 맞닿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먼저 진리를 배웁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에서 배웁니다. 이 단계에서는 진리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됩니다. 처음에는 ‘옳기 때문에’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선 안에서 살아납니다. 마치 빛이 불꽃에서 나오는 것처럼 됩니다. 결국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을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먼저 사랑하고 나중에 믿는다’는 단순한 순서가 아니라, 신앙의 최종적인 생명과 목적이 체어리티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리가 결국 선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직 완성된 신앙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 가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겨울의 빛’이라는 비유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울의 빛도 빛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보고 ‘나는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위험합니다. 전혀 어둡다면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고 교리적으로 밝다고 생각하면, 그 빛에 열이 없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습니다. 가인 역시 자기 신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C.362에서 보았듯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자신의 교리를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기 생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은 점점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더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확신과 영적 생명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반드시 살아 있는 신앙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교리에 매우 확신하면서도 체어리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진리를 굳게 붙들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을 향하게 합니다. 참된 빛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살립니다. 그래서 진리가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결국 체어리티와 결합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가인이 아벨과 함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벨 위에 서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제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결합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이 지배욕이 결국 다음 단계에서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했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비극은 단순히 ‘사랑이 부족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질서가 뒤집혔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목적이 되고, 체어리티가 수단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선 위에 올라섰습니다. 교리가 삶보다 앞섰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의 전도가 지속되자, 결국 사랑 없는 신앙이 자기 사랑과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파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드시 ‘그 믿음은 나를 어떤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는가?’와 함께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선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가?’와 함께 ‘그 교리가 내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 앞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제자리를 찾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에 생명을 주고, 신앙은 체어리티에 빛을 줍니다. 사랑은 진리를 따뜻하게 하고, 진리는 사랑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밝혀 줍니다. 불꽃과 열과 빛이 하나를 이루듯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도 하나입니다. 인간 안에서 그 둘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신앙도 살아 있고, 체어리티도 지혜롭게 됩니다.
결국 AC.365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에는 빛이 있는가?’가 아닙니다. ‘그 빛에 열이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열은 자기 열심이나 감정적 뜨거움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그 열이 함께할 때 신앙의 빛은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나 그 열이 사라지면 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겨울의 빛이 되어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입니다. 진리가 선을 섬기고, 아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믿는 것이 삶이 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체어리티가 되고, 그 체어리티 안에서 진리의 빛이 살아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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