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는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들’(field)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빛’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들’(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whatever is of doctrin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를 ‘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들’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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