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이 없고, 천사들에게는 날과 해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루’는 무엇일까요? 정말 죽은 뒤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영계에 들어간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하루’ 자체가 하나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먼저 두 가지 관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에 아직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와 독자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계 안에서 살아가는 영과 천사의 관점입니다. AC.70의 문장은 자연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는 스베덴보리가 역시 자연계의 독자에게 죽음 이후의 일을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그는 ‘육체가 죽은 뒤 다른 삶 안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하루’를 처음부터 영계의 상징적인 상태 주기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천국과 지옥’ 162-165에서 영계의 시간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도 사건들은 서로 이어지고 진행되지만 천사들에게는 자연계 사람과 같은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계에는 해와 날이 있지만 천국에는 그 대신 상태의 변화가 있으며, 사람의 자연적 시간 관념이 천사에게 전달되면 천사는 그것을 시간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상응하는 상태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계에는 자연계와 같은 24시간제의 하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런 의미의 하루는 없다’고 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영계에는 자연적 하루가 없다’는 사실과 ‘AC.70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연적 시간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독자에게 자신이 관찰한 사후 소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자연계의 사건을 기준으로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하루라는 말은 사실 시간 뜻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주기라는 뜻이다’라고 바꾸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가령 스베덴보리가 ‘나는 어떤 사람이 죽은 뒤 열두 시간 후에 그와 이야기했다’고 자연계의 관찰자로서 말한다면, 그 사람이 영계에서 열두 시간을 시계로 재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연계에 남아 있는 관찰자가 자연계의 시간으로 경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AC.70의 ‘거의 하루’도 우선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24시간보다 짧다는 교리적 시간표일까요? 그렇게까지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70은 사망 시각부터 몇 시간 몇 분 만에 영적인 의식이 완전히 열리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강조점은 훨씬 분명합니다.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긴 공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뒤 곧바로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AC들에서는 그 ‘소생’이 아무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완료되는 것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육체의 생명이 끝나고 영으로서 의식적으로 깨어나는 데에는 주님의 질서 아래 일정한 과정이 있으며, 천사들이 함께하는 단계들이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연속’은 ‘아무런 과정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와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즉시’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도 같은 구별이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사람은 죽으면 즉시 영계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의 ‘즉시’는 죽음과 사후생명 사이에 수백 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기다리는 별도의 삶의 공백이 없다는 뜻으로는 적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심장이 멈추는 바로 그 0.001초 뒤에 소생의 전 과정이 끝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0 자체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어떤 질서 있는 전환 과정이 있음을 암시하고, 그 과정은 이어지는 글들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의 하루’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AC.70 한 글만으로 개인마다 몇 시간씩 달라진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후 소생에 관한 여러 기록을 읽으면서 각 상태의 차이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정확한 ‘사후 24시간 규칙’을 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과 의식적인 다른 삶 사이가 매우 짧고 연속적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피해야 할 것은 이 표현을 주님의 ‘사흘 만에 부활하사’와 곧바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셋’이나 ‘셋째 날’이 충만함이나 완성을 뜻하는 경우가 있고, 스베덴보리도 그러한 상응을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0의 ‘거의 하루’와 주님의 부활의 ‘사흘’을 동일한 사후 소생 원리로 연결하는 것은 이 본문이 하지 않는 설명입니다. 특히 주님의 영화와 부활은 보통 인간의 사후 소생과 그대로 동일시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므로, 관련 AC에서 직접 다룰 때 별도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구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사후 소생과 주님의 부활을 둘 다 ‘죽음 이후의 깨어남’이라는 말만으로 같은 구조에 넣으면, 주님의 신적 인성과 영화라는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가르침을 흐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0에서는 일반 인간의 소생에 집중하고, 주님의 부활 문제는 관련 본문이 나올 때 그 자체의 문맥에서 다루는 것이 가이드 1.0에도 맞습니다.
그러면 ‘영계에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무 순서도 없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천국에서도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진행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자연계처럼 태양의 운동을 기준으로 일정하게 반복되는 시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상태가 변화하면서 연속과 진행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계 사람에게는 시간과 비슷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후세계 기록을 읽다가 ‘하루’, ‘몇 시간’, ‘오랫동안’, ‘곧’, ‘이후’ 같은 말을 만나면 두 가지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에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자연계 독자에게 설명할 때에는 자연적 시간 표현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영들과 천사들이 그 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연속은 자연계의 시계 시간과 동일하지 않고 상태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AC.70의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는 가장 먼저 ‘죽음 이후 오랜 공백 없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의 의식 안에 있게 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하루를 반드시 24시간이라는 교리적 제한으로 고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하루는 시간과 전혀 관계없고 순전히 하나의 상태를 상징한다’고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사용한 목적은 ‘영계의 하루가 몇 시간인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문장이 목적을 알려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은 뒤 오래도록 무의식적인 공백 속에 있다가 먼 훗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매우 가까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입니다.
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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