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97, 강문호 수도사, ‘티흔 수도사’ (20200120)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번 영상은 앞서 다루었던 2020년 1월 5일의 티혼 수도사 이야기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다만 이번에는 티혼 수도사의 극단적 금욕생활뿐 아니라 그가 연결되어 소개되는 아토스의 이비론 수도원, 그곳의 공동생활과 식사 규칙, 기도와 금식,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가 실제로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까지 함께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앞서 이미 살핀 ‘금욕과 거듭남’의 문제를 되풀이하기보다, 영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 ‘외적 질서와 내적 질서’,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한 가지는 구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188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티혼 수도사가 여러 수도원을 찾아다닌 끝에 이비론 수도원에 이르러 그곳에서 수도한 인물처럼 소개됩니다. 그러나 현재 확인되는 정교회 자료에서 티혼 골렌코프(1884-1968)는 아토스의 카프살라에서 살았던 러시아계 은수자로, 말년에는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성십자가 켈리에서 살았으며, 훗날 성 파이시오스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2026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그를 공식 성인 명부에 올렸습니다. 그러므로 티혼을 이비론 수도원이 ‘배출한 대표적 수도사’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Cloud of Witnesses) 이것은 영상의 영적 메시지를 무너뜨리는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과 인물의 실제 관계를 구별해 두자는 정도입니다.
영상의 티혼 수도사 묘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극단적인 금욕입니다. 잠들지 않기 위해 목에 끈을 걸고 밤새 기도하고, 아주 적은 음식만 먹으며, 딱딱한 잠자리와 한 장의 담요로 겨울과 여름을 지낸 것으로 소개됩니다. 또한 ‘탐식은 모든 죄가 들어오는 현관문’이라는 생각 아래 배부름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해지는 티혼의 생애에서도 극심한 가난과 지속적인 기도와 금욕은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Cloud of Witnesses) 이런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먼저 그 진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갈망하여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기도에 생애를 바친 사람의 열망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언제나 여기서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갑니다. 적게 먹는 것이 곧 탐욕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며, 딱딱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 곧 proprium을 제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에 열매 반쪽만 먹으면서도 자기 금욕을 자랑할 수 있고,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감사와 절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음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는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육체를 가능한 한 괴롭히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절제는 내적 거듭남을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배부르면 음란해지고, 배부르면 교만해지고, 배부르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영상의 설명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과식과 탐식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영적 집중력을 흐릴 수 있다는 수도 전통의 경험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의 근원이 음식이나 배부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의 뿌리는 인간의 proprium 안에서 주님과 이웃보다 자신을 사랑하려는 질서의 전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탐식을 절제했는데도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 공로를 높이고, 타인을 업신여긴다면 근본적인 싸움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음식에 대한 절제도 결국 이러한 내적 악과 싸우는 데 봉사할 때 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티혼과 동물들의 관계를 전하는 부분은 따뜻합니다. 여우가 찾아오고, 멧돼지 새끼들을 보호하며, 사냥꾼에게 동물을 숨겨 주고, 심지어 곤충들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했다는 성인전적 이야기까지 소개됩니다. 이런 세부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수도자의 거룩함이 인간에게만 친절한 데서 끝나지 않고 피조물 전체에 대한 온유함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론에서도 동물은 인간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상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여우나 멧돼지를 곧바로 특정 애정과 일대일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인간 안의 거칠고 자연적인 것까지 주님의 질서 아래 평화롭게 놓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으로는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영상은 이런 혹독한 훈련 끝에 티혼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중요한 구별을 하나 더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의미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생명 자체이시고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내 안의 선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참된 결합은 ‘내가 어떤 높은 영적 단계에 올랐다’는 자기의식보다, 자신의 생명과 선이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영상 중간의 우물 이야기에서도 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가뭄으로 우물이 말랐을 때 성자의 초상화를 우물에 넣고 수도자들이 기도하자 물이 차올라 초상화가 떠올랐다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강문호 수도사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닫힌 문을 연다’는 취지로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수도원 전승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을 ‘내가 바라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능력’으로만 이해하면 기도가 어느새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이 주님의 섭리와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응답이 내가 요구한 형태로 오지 않을 때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가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이번 영상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이비론 수도원의 공동 식사입니다. 원장이 먹기 시작하면 모두 함께 먹고, 원장이 수저를 놓으면 아직 다 먹지 못했어도 모두 수저를 놓으며, 식사 중에는 한 사람이 성경을 읽어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함께 취한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에 담긴 질서와 절제는 충분히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수도원장이 모든 것의 표준’이라는 표현은 영적으로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운영에는 외적 질서가 필요하고 수도자는 자발적으로 그 질서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진리의 최종 기준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과 말씀입니다. 인간 지도자에게 대한 순종이 주님께 대한 순종을 돕는 수단이라면 좋은 질서가 되지만, 지도자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면 외적 순종이 내적 자유를 침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원 밖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은 강제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시면서 그가 선과 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순명은 ‘한 인간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외적 규율이 그것을 훈련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원장이 숟가락을 놓았기 때문에 나도 숟가락을 놓는 훈련보다 더 깊은 것은, 내 욕망이 ‘조금 더 먹고 싶다’,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나는 예외이고 싶다’고 말할 때 그것을 주님의 질서 아래 놓는 내적 순종입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만난 일본 수도사가 ‘한국에서 온 수도사가 없다. 한국과 아토스의 고리를 만들어 달라’며 자신을 붙들었다는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도 이런 수도 영성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강문호 수도사의 오랜 열망이 드러납니다. 영상 마지막에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교회 수도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소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활동, 성장, 재정, 조직, 프로그램에 치우칠 때 기도와 절제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자는 요청은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는 것’과 ‘거듭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도복을 입은 사람의 수가 많아져도 자기 사랑과 공로의식과 지배욕이 그대로라면 천국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수도사라는 이름을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자신의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정직한 쓰임을 행한다면 그는 실질적으로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수도 영성을 바라보면서 계속 외적 형식과 내적 상태를 구별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하나님하고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사막이 도시가 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그곳이 아름답다’는 취지의 말은 상당히 좋습니다. 다만 ‘아름다운 사람’의 기준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올 때 그 사람을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의 아름다움도 천사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영상은 앞서 살핀 티혼 수도사 이야기보다 조금 더 넓은 질문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거룩한 수도자가 되는 법’보다 ‘거룩한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극단적인 금식, 긴 기도, 엄격한 규칙, 침묵, 수도원장의 권위가 공동체를 특별하게 보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공동체의 진정한 표지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의 공을 내려놓으며, 각자의 쓰임을 통해 전체의 선을 섬기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질서가 이러한 내적 질서를 보호한다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외적 질서 자체가 거룩함의 증표가 되는 순간 수도원 역시 세상의 다른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영상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가장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는 문장은 어쩌면 ‘지독한 훈련 끝에 드디어 하나님과 합일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지독하게 하면 도달하는 영적 고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버리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새 의지와 새 이해를 형성하시도록 허용하는 평생의 과정입니다. 인간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 자체를 구원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장 깊이 거듭난 사람일수록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다’보다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끄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티혼의 극단적 금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이 영상에서 우리가 취할 결론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서 받아들일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하고 싶었던 갈망’,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했던 절제’,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려 했던 태도’, ‘피조물에게까지 미친 온유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오늘 우리의 형편 속에서 더 내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음식을 조금 덜 먹는 것보다 탐욕을 덜 먹이고, 말을 조금 덜 하는 것보다 자기 자랑을 덜 말하며, 세상을 떠나 동굴로 들어가는 것보다 자기 안의 proprium을 발견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깊은 수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토스의 숲과 수도원이 ‘천국 같은 곳’인 이유가 있다면 건물이나 금식 규칙이나 수도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곳에 천국의 어떤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천국은 아토스에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식탁에서도, 작은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병실에서도 주님의 질서가 인간의 의지와 생각 속에 받아들여지면 천국의 어떤 것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수도원의 외적 아름다움을 지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바라보게 하는 더 깊은 수도원, 곧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세우시는 내적 질서일 것입니다.
SY.96, 강문호 수도사, ‘바늘로 천국을 만들었다’ (20260901)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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