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99, 창4:17, ‘가인이 에녹을 낳고 성을 쌓다 - 분리된 신앙이 새로운 교리 체계를 낳다’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창4:17)
AC.399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분열 또는 이단이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산출하였고, 그것이 ‘에녹’(Enoch)이라 불렸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쌓은 성읍’(the city which he built)은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분열 또는 이단이 ‘에녹’(Enoch)이라 불렸기 때문에,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고 한 것입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AC.399부터 가인 계열의 계보가 시작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성읍을 건설하여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에녹이라고 부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를 단순한 가족사의 기록으로 읽지 않습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하나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듯이, 가인에게서 태어난 ‘에녹’은 그 분열이 자기 자신에게서 다시 산출한 또 다른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낳는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결론과 교리를 산출합니다. 가인의 최초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그 자체로 신앙일 수 있다’는 원리가 일단 자리 잡으면, 거기에서 여러 후속적인 생각과 교리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파생을 계보의 ‘출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한 이단 뒤에 우연히 또 다른 이단이 나타났다는 뜻보다 더 깊습니다. 원문은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곧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것을 산출하였다’고 합니다. 새로운 분열은 이전 분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최초의 원리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어 ‘성읍’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쌓은 성읍을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전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분열된 원리였던 것이 이제 여러 교리적인 내용들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생각이나 주장 하나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가르침들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읍’은 분리된 신앙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정착된 상태를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99의 원문이 직접 ‘교리 체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문은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곧 ‘거기서 나온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읍 = 교리 체계’는 이 표현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말로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이번 번호에서 직접 그렇게 정의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여러 교리적·이단적 내용이 산출되고 그것들이 하나의 성읍으로 표상된다는 데 초점을 두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AC.397-398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놋 땅에 거했으며, 전에 사랑이 지배하던 이해의 마음과 전에 체어리티가 지배하던 합리적 마음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AC.398에서는 사랑 대신 신앙이, 의지 대신 이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9에서는 바로 그 이해와 신앙이 독립적으로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교리적 산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이해가 사랑과 선을 섬길 때에는 진리가 삶을 인도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 하면, 사람은 자신이 세운 전제에서 계속 새로운 논리와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어도 그 위에 매우 정교하고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교리가 살아 있는 진리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교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그 교리가 산출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진리의 교리는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에서 산출된 교리는 아무리 정교하게 조직되어도 그 최초의 분리를 계속 품을 수 있습니다. AC.399의 성읍은 바로 후자의 문맥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성읍의 이름을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 하였다’는 표현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분열 또는 이단 자체가 에녹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온 교리적·이단적 전체도 에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그 성읍의 성격은 그것을 낳은 원리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읍을 구성하는 여러 교리가 아무리 많아져도 그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근원이 된 ‘에녹’이라는 분열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 두어야 할 것이 ‘가인 계열의 에녹’과 훗날 창5에 등장하는 ‘셋 계열의 에녹’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번 AC.399의 에녹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파생된 분열 또는 이단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에 속한 것들을 모아 교리적인 형태로 보존한 것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성경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한 상응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두 에녹을 나중에 함께 보면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가인 계열에서는 교리화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전개하고 굳히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반면, 셋 계열의 에녹에서는 쇠퇴해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에서 분리된 교리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 가는 생명의 지혜를 보존하기 위한 교리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창5의 해당 AC 번호에 이르렀을 때 충분히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
AC.399는 또한 ‘가인의 표’가 왜 신앙의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그 신앙이 곧바로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존된 신앙은 여전히 인간의 자유 안에서 사용될 수 있었고, 가인의 계열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분열과 교리적 체계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주님의 보존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강제적인 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필요했습니다. 앞의 AC.393-398에서 반복해서 보았듯이,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잃은 뒤에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해 능력과 신앙의 지식이 한편으로는 분리된 교리 체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것은 신앙의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사랑과 결합되고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따라서 AC.399는 가인의 후손들을 단순한 고대 족보로 읽기보다, 하나의 잘못된 영적 원리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또 다른 원리를 낳고, 그것이 다시 교리적인 것들을 형성하면서 발전하는지를 보여 주는 출발점입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것은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산출한 것이며,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교리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 전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결국 이번 번호가 던지는 질문은 ‘교리가 얼마나 정교한가?’보다 더 깊습니다. ‘그 교리는 어디에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나온 신앙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지배하려는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에녹과 성읍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후손을 낳고 교리를 만들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생명은 교리의 규모나 논리적 정교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다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에 결합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AC.399 해설)